서귀포 항구를 에워싸고 있는 서귀동은 서귀포 칠십리의 서쪽 끝에 위치한다. 서귀포 칠십리는 서귀포 사람들 가슴 속에 그 정서와 경치를 함축한 서귀포 사랑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바로 이 느낌이 ‘서귀포칠십리’로 노래돼 불리면서 서귀포는 일제시대를 살아내던 국민들에게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고향’으로 인식됐다. 추측컨대 그래서 서귀포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고, 그 이름에 이끌려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천지연과 정방폭포가 인기를 끌면서 ‘한국관광의 1번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실상 가요의 서귀포칠십리에 등장하는 주역은 바다와 해녀다.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전복 따던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와 같은 가사가 말해주듯이. 어쨌든 서귀포가 관광지로 명성을 날리게 되자 관광객을 위해 해안가에 호텔이 들어서고 여객선을 위한 부두가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해녀들이 물질하던 바다는 사정없이 매립되었고, 돌고래를 따라 자유롭게 넘나들던 물결 위에도 방파제가 시설되었다. 넓어진 항구 내로 잠수함과 유람선이 분주하게 드나드는 사이, 해녀들의 바당밭은 속절없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바다의 관광지화로 줄어든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해녀들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손수 잡은 소라나 해삼, 문어, 전복 등을 판매하는, 소위 ‘해녀의 집’을 열었다. 다행히 지난해 말,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해녀들이 일하는 서귀포 앞바다가 천지연이나 정방폭포 못지않은 관광명소가 됐다.

바닷가에는 해녀들을 구경하고 찍어대느라 여념 없는 관광객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이제 해녀는 제주관광의 새로운 브랜드로 부상할 터다. 관광의 진정한 매력이 관광지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이라면 해녀야말로 바로 그 제주사람이 아니겠는가.

서귀동의 현직 해녀 중에서 가장 고참인 할머니는 88세다. 정방폭포 동쪽의 검은여 근처에서 태어난 그녀는 예닐곱 살에 아기좀수가 됐다.

22살에 서귀포 시내로 시집을 온 후에는 새섬 근처에서 물질을 했다. 어쩌면 서귀포칠십리의 전복 따는 아가씨가 그녀였는지 모를 일이다. 남편이 일찍 떠나는 바람에 3남 2녀를 물질로 키웠다. 누구보다도 아까운 자식들이건만 손수 잡은 문어, 소라, 오분작 등을 먹이지 못했다. 바다에서 잡은 것들은 어떻게든 팔아서 아이들 공부에 썼다. 생활비는 물질이 끝난 후 자리나 생선 같은 것을 짊어지고 나가 행상해서 벌었다. 사람들은 은근히 해녀를 천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녀는 늘 몸을 오그리고 살았다.

하늘이 도왔을까? 고무옷이 도입돼서 소중이 대신 입던 날, 그녀는 ‘이 옷이라면 관덕정이라도 가겠다’ 싶게 온몸이 펴졌다. 겨울철에도 벌거벗다시피 해서 바다로 몸을 던질 적에는 얼마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던가. 옷을 갈아입을 탈의장마저 없으니 보는 사람들의 시선 또한 오죽하였으랴. 그러니 웬만큼 먹고살 만하면 해녀를 그만두었다. 지금 서귀동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은 모두가 타지에서 시집온 며느리들이다.

되돌아보면 60∼70년을 바다와 함께 살아온 그녀. 바다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바다는 그녀의 남편이자 친구였다. 지금도 그 바다를 벗 삼아 정방폭포 옆에서 해산물을 판다. 평생직장인 바다에서 생애 최고의 시간을 보내는 심정이다. 그런데 장사용 천막이 불법이라며 주기적으로 철거 명령이 떨어진다. 사실은 관광객들도 비가 오면 들어와 비를 긋고, 햇볕이 뜨거우면 더위를 피하는 그늘막인데 말이다. 게다가 관광객들은 할망과 함께 사진찍기를 폭포 이상으로 좋아한다.

그녀의 소원은 사랑하는 바다에서 마음 편히 서귀포 소라를 팔아보는 것이다. 관광객들에게 물질 얘기도 들려주고, 제주인심도 듬뿍듬뿍 나눠주면서. 그러고 보면 관광지 해녀들의 사회적 위상만큼 제주관광의 진정한 품격도 세워지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