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은 사진을 보며
무릎 꿇은 사진을 보며
  • 제주신보
  • 승인 201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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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전 중등교장/시인

가을바람이 불어서일까, 느닷없이 인체의 신비를 생각한다. 걷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웃고 울 수 있다는 것, 내 몸 어느 곳에서 영혼이 숨 쉬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경외감을 자아낸다.

오래전 일이다. 담을 넘다가 작은 돌덩이가 왼쪽 발등 위로 떨어졌다. 새끼발가락 쪽이 이내 부어오르며 통증이 일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으니 새끼발가락 뼈가 부러져 있었다. 의사는 철심으로 부러진 뼈를 잇든지 바깥 부위를 잘라 내라고 했다. 어느 처방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사흘 치 진통제와 소염제를 처방 받고 병원을 나섰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약간 굵어지게 뼈가 붙었다. 원상으로 되돌리는 놀라운 자연 치유력이었다.

상실된 인체의 기능이 모두 원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고향 출신 교직원 모임이 개최하는 여름 야유회에 참석했었다. 여흥이 깊어 갈 무렵 술을 못하는 나는 바닷가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릴낚싯대를 바위틈에 고정시켰다. 한참 수영을 즐기고 뭍으로 올라오는 순간 한 회원이 나의 낚싯줄을 들쳐 올리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납봉돌이 왼쪽 눈을 강타한 것이다. 서울의 큰 병원까지 들락거렸지만 시력을 회복할 순 없었다.

참으려는 울음이 계속 이어졌다. 무슨 잘못을 했을까, 무슨 죄를 지었을까, 지나온 시간들을 헤아리고 또 헤아렸다. 조심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일 텐데,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거리감이나 공간 감각이 둔해서 계단을 오르내릴 때 신경을 써야 한다. 상대방과 눈을 마주칠 때면 슬며시 시선을 피하고픈 콤플렉스가 생긴다. 눈을 혹사시켜 쉬 피곤해지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시력 장애가 부정의 씨앗만 뿌린 건 아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사물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했으며 장애인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오히려 큰 축복이다.

일전에 본 한 중앙지의 사진이 마음의 벽에 걸려 있다. 장애 학생 엄마들이 무릎 꿇은 모습이다. 강서 지역 공립 특수학교를 짓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죄인이라며 애원하고 있다. 신이 아니라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도 “쇼하지 말라.” “장애인에게 학교가 뭐가 필요하냐.” “차라리 하수처리장이 낫다.”는 말도 튀어나왔다니 눈가가 이내 젖어들었다.

지역 주민들은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반대하는 모양이다. 돈이 실력이 되는 세상이니 그들 마음을 모를 바는 아니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어서 집 근처에 도축장이나 화장 시설이 들어선다면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특수학교는 달리 바라봐야 되지 않을까. 안면이나 팔다리가 뒤틀리고, 말이 어눌하고 지능이 많이 모자란 가족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지금은 아닐지라도 훗날 불행한 후손이 태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순간적인 존재로 만족할 수 있는가. 설령 집값이 좀 떨어진다 해도, 장애인들과 조우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해도 시나브로 마음이 넓어지고 인생의 의미가 새로워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몇 년째 월 1회 교우들과 지적 장애인 목욕 봉사를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덩치 큰 청소년들의 낯선 언행에 당혹감이 일기도 했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다. 그들 부모의 마음을 읽고 하느님의 섭리를 헤아리게 된다.

장애인은 죄인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새기려 한다.

“우리는 죄인이어도 하느님께는 가장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