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열정과 혼으로 한국 판화 새 지평 연 '고독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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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싸움꾼서 오현고 강광.박성은 스승 덕 미술 전념
국전 대상 등 국내외 상 수상...수묵화 본고장서도 러브콜
"대자연 품은 제주, 창작 활동 제격"...타지 작가 수용해야
▲ 강승희 화가(오른쪽)과 부인 고순옥씨가 김포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품(서양화)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판화가인 강승희 화가(57). 미술계에선 ‘고독한(독한) 사나이’라 불릴 정도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자 승부를 걸었다. 그의 인생에는 변곡점도 많았다. 학창시절에는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 청소년기 방황을 접고 미술과 학업에 전념한 끝에 미술계의 거장으로 우뚝서게 됐다.

 

▲노력으로 운명을 바꾸다=강승희 화가는 1960년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면서 시내로 이사를 갔다. 제주남초등학교와 제주제일중을 졸업했다. 중학생 시절 속칭 ‘짱’이었다. 또래는 물론 선배들도 주먹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의 부친은 제주시 총무국장을 역임한 강창붕씨다.

 

“중학생 때 열등반에 있었죠. 아버지가 ‘부하 직원의 아들은 공부를 잘해 우등반에 있는데…’라며 한숨을 쉬더군요. 중 3때 마음을 잡고 공부를 시작했죠. 오현고에 입학하면서 주먹세계와 결별을 하게 됐습니다.”

 

그의 부친은 술을 잘 못했지만 총무국장이라는 직책 상 중앙정부에서 공무원들이 올 때마다 접대를 했다. 서귀포시장 발령을 앞두고 58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고1 때부터 미술부에 들어간 그는 도시락 3개를 싸고 다녔다. 맨 먼저 등교하고 밤 10시30분 막차를 타고 귀가했다. 도내에 미술학원이 없었던 시절, 운 좋게도 걸출한 스승을 만났다.

 

당시 오현고에는 서울대 출신으로 제주가 좋아서 정착한 강광 교사와 이화여대에 이어 파리에서 유학을 한 박성은 교사가 교편생활을 했다. 강광 교사는 나중에 인천시립대 부총장을, 박성은 교사는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2명의 은사를 만나면서 미술에 전념할 수 있었죠. 여기에 선배들은 남들과 비슷한 그림을 그리면 ‘빠따’를 때렸죠. 위계질서가 엄격했지만 창의력과 표현력을 기르는 데 최고의 환경이었죠. 전시회와 대학 입시를 앞두고는 미술부에서 밤을 새다시피 했습니다.”

 

그는 1980년 홍익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홍익대 80학번 제주 출신 동기로는 동양화의 대가인 문봉선 화가가 있다. 오현고 미술부 선배인 고영훈 화가는 극사실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거목으로 꼽히고 있다.

 

 

▲ 강승희 화가가 제작한 동판화를 찍어내는 모습.

 

▲“먹고 살기위해 그렸다”=홍익대와 동대학원에서 서양화 석사를 취득하고, 부전공으로 판화를 배운 그는 ‘먹고 살기 위해 그렸다’고 회고했다.

 

대학원생 시절 작품 창작에 목이 말랐다. 하숙집에서 오전 5시30분에 나와 학교를 갔다. 미물이 깨어나지 않은 고요한 새벽의 도시는 고향 제주의 자연과 닮았다. 자기 깨달음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새벽은 구도자의 느낌을 갖게 했다.

 

“새벽 풍경과 명상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 느낌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줄 것인가를 늘 고민을 했죠.” 그가 30년 동안 새벽 풍경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한 이유이기도 했다.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1987년 제주시 내도동 출신으로 교사였던 아내 고순옥씨(56)와 결혼했다. 아침에는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후 대학원에서 조교생활을 했다. 학비와 육아비를 마련하기 위해 저녁에는 미술학원을 운영했다. 밤 10시쯤 학원을 끝낸 후에야 공모전 출품작을 만들고,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조교 월급이 18만5000원이었죠. 각박한 서울생활과 치열한 미술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 3시간을 자면서 일했죠. 체력이 받쳐줬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교사인 그의 아내는 최근 명퇴를 했다. 슬하에 2남 1녀를 뒀다. 김포 모 고교에서 1,2등을 했던 장남은 홍익대 시각디자인과에, 차남은 홍익대 회화과에, 막내 딸은 추계대 동양학과에 입학했다. 자녀들은 그의 길을 따르고 있다.

 

 

 

▲각종 대회를 휩쓸다=“젊은 시절 주어진 현실이 너무 각박했죠. 요령을 피우지 말고 무조건 열심히 하자고 스스로가 다짐을 했죠.”

 

동판화 하나를 만드는 데 150번을 깎고, 긁어내고 강한 질산염에 부식시키는 작업을 되풀이 했다. 한 작품에 꼬박 3개월이 소요됐다. 1987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에 이어 1991년 국전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일본 와카야마 국제판화비엔날레에선 2등상을 차지했다. 2000년 제1회 칭다오 국제판화비엔날레에선 동상을 수상했다.

 

국내·외에서 열린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차가운 동판화에서 수묵화 느낌의 퍼지는 부드러움을 창조했다. 수없이 많은 점들이 모여 커다랗고 질량의 높은 검정 톤과 밀도를 동판에 새겨 놓았다.

1994년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그의 입지와 미술세계는 더욱 탄탄해졌다.

 

당시 우리나라에 판화 붐이 일었지만 기술적으로는 미약했다. 해외 유학파도 있었지만 현실에 맞는 도구를 개발하고, 창의적인 실험에 도전한 그는 한국 판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검정으로만 표현한 변화와 색감은 수묵화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에서 초청을 받아 전시를 하고 강연을 했다.

 

“공산당 간부가 내 강연을 듣고 작품을 보고나선 1년만 충칭시 사천미술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와 달라고 하더군요. 여건이 안 돼 가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제주, 예술의 토양을 품다=“대자연을 품고 있는 제주는 예술적으로 굉장히 좋은 환경을 갖고 있죠. 유배를 온 김정희 선생이 추사체를 완성을 하는 등 외부인의 입장에선 독특한 환경에서 창작활동을 하기에 제격입니다.

 

그는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제주 출신 미술인들의 모임인 한라미술인협회를 가입, 제주도립미술관을 수 차례 방문해 강연을 했다. 2009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김만덕 나눔쌀 만석 쌓기 행사에선 특별전시회를 열어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다.

 

그는 아쉬운 점도 있다고 했다. “예술적 토양이 좋아서 제주에 정착하려는 화가는 많은데 배척을 하는 게 문제죠. 작품을 포용해주고 작가를 수용해야만 제주 미술계는 외톨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는 15년 전 경기 김포시 농촌마을에 작업실을 차렸다. 이 곳에서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새벽을 주제로 했던 판화를 이번에는 서양화로 승화하기로 했다. 그는 60살이 되는 3년 후에 새로운 작품세계를 펼쳐 보이기 위해 쉬지 않고 붓 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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