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삼첩칠봉에서 달빛에게 사랑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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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원당봉 바람난장
▲ 서른 여덟 번째 바람난장이 원당봉에서 진행됐다. 유창훈 作 ‘불탑사 오층석탑’.

"보아라!

눈썹 위로 불붙는 태양!"

 

새천년이 열리는 감동의 순간입니다.

천년에 한번밖에 못 보는 장관입니다.

 

"시민 여러분! 따라하세요!

새천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

새천년 새해에 소원 성취하세요¡"

 

이는 단순한 새해 덕담이라기보다는

원당봉에서 부르는 새천년의 노래입니다.

 

일 년을 넘어 백년을

백년을 넘어 천년을 구가하는

당신과 나의 소중한 노래입니다.

 

백년도 못사는 우리네 인생,

감히 천년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싶은

경건한 이 새벽에

 

원당봉에서 부르는 새천년의 노래는

한라산 골골을 흔들어 깨우는

메아리가 되어 흩어집니다.

 

- 정인수 「원당봉에서 부르는 새천년의 노래」 전문

 

▲ 김기선 낭송가가 정인수 시인의 시 ‘원당봉에서 부르는 새천년의 노래’를 낭송하고 있다.

 

제주시의 동쪽 삼양마을은 오래전부터 유명한 장소가 두 곳이나 있다. 검은 모래 해변과 원당봉이다. 예전에는 여름이 되면 몸이 부실한 여인들이 이 바닷가로 모여들었다. 검은 모래찜질을 하기 위해서다. 모래찜질은 한여름 뙤약볕에서 해야 효과가 있다. 신경통 환자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아들을 낳을 짱짱한 양기를 충전 받기 위한 모래찜질이었다. 이게 여의치 않은 여인들은 정월대보름이나 8월 추석 대보름 밤에 이곳을 찾았다. 보름달의 정기(精氣)를 흡입하기 위해서였다. 달은 여성이다. 만월(滿月)의 정기, 즉 월정(月精)을 빨아들임은 여성성의 만땅 충전이었다. 충실한 몸이라야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 김옥자 낭송가가 조영자 시인의 시 ‘돌가시나무·3’를 낭송하고 있다.

원당봉은 산정(山頂)에 호수가 있다. 이 호수의 모양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여성의 자궁 형태였다. 지금은 그 신비한 원형이 훼손되어 연못이 약간 남아있을 뿐이라 많이 안타깝다. 원(元)나라에 공녀(貢女)로 끌려간 고려 여인 기(奇) 씨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자 내밀히 온 나라에 아들을 점지해줄 영험한 장소를 찾도록 명을 내린다. 바닷가에 면한 삼첩칠봉(三疊七峰)을 찾아라! 그곳이 바로 원당봉이다. 그녀는 원당봉에 라마승들을 보내어 밤낮으로 기도를 올리게 하여 황태자를 낳았고 그토록 소원하던 황후가 되었다. 그 기도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그 주변에는 운동기구들이 즐비하다. 그토록 신비하고 신성한 공간에 기어코 운동기구를 설치해놓은 그 발상이라니, 참 얄궂기도 해라.

 

이번 바람난장은 그야말로 18호 태풍 ‘탈림’ 속에서 진행됐다. 바람을 무릅쓰고 모이긴 했으나 우리들의 대화나 시낭송은 바람에 여지없이 툭툭 한 귀퉁이가 뜯겨져 나갔다. 탈림의 영향으로 제주도는 어딜 가나 비바람 천지인데 원당봉에만 비가 오지 않고 바람만 부니 그것만도 혜택을 받은 듯.

 

원당봉 정상에는 정인수(鄭仁洙) 시인의 「원당봉에서 부르는 새천년의 노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새천년을 기념하여 삼양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세운 것이다. 그 시를 김기선 낭송가가 목소리를 최대 볼륨으로 높여 바람에 맞서며 낭송했는데 아무래도 바람을 이기진 못했다. 이어서 조영자의 「돌가시나무·3」을 김옥자 낭송가가 낭송했다. 시가 바람에 토막토막 부러지며 저 멀리 쓸려간다. 이런 날은 낭송이란 게 음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체력으로 한다는 걸 절로 깨닫는다.

 

▲ 서른여덟 번째 바람난장이 원당봉에서 펼쳐졌다. 사진은 불탑사 5층석탑 앞 바람난장 가족들의 모습.

우리는 서둘러 기슭에 있는 원당사로 향했다. 기 황후(1315~1369)는 원당봉에 기도하여 황태자를 낳자 그 보답으로 원당사(元堂寺)를 창건하고 오층탑을 세웠다. 이 오층탑은 현재 보물 제 118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검은빛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있어 육지의 탑들과는 분위기가 완전 다르다. 이 탑은 단순하고 소박하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단순함, 그 소박함이 왜 이리 어여쁜가! 거기다 천년의 나이까지 더해져 그 아름다움은 고요하나 황홀하다. 미술사에서는 이를 고졸미(古拙美)라 하던가. 명품은 천년의 나이쯤은 나이도 아니란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천년의 미술품을 간직한 삼양마을이 참 부럽다. 바람난장 멤버들도 오늘은 오층탑 본 것만으로도 수지맞은 날이다. 태풍을 무릅쓰고 나서길 참 잘했다.

 

 

 

글=김순이

그림=유창훈

사진= 손희정

시낭송=김기선 김옥자

 

 

※ 다음 바람난장은 9월 23일 오후 5시 북촌돌하르방공원에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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