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궁금하거나 의문이 나는 학문 내용이 있으면 물어야’
(10)‘궁금하거나 의문이 나는 학문 내용이 있으면 물어야’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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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당疑問堂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대정향교 모습. 1408년(태종 8)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대정현(大靜縣) 성내 (城內)에 창건하였다. 1652년(효종 3)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강봉환姜奉煥:1867(고종4)~1961,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운동. 본관은 진주, 강원선姜元先의 아들로 한림읍 금악리<거문-오름>에서 태어나 선도교仙道敎의 신도가 되었다.


일제는 민족 종교인 선도교를 사교 집단으로 매도 격하하면서 법정사 항일 운동을 가혹하게 대처해 나갔다.


그는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앞서 일제는 법정사 항일운동 관련자 66명을 3차에 걸쳐서 목포검사국으로 송치, 이들에 대한 재판이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열려 31명에 대해 실형을 언도했으며 2명은 재판 직전에 심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또 15명에게는 벌금형을, 나머지 18명은 불기소 처분을 선고하여 석방했다.

 

▲강봉희姜鳳熙:1894(고종31)~1942(일제강점기), 개업 의생, 진주강씨 은열殷烈공파 염통악念通岳계, 의사 강황열姜璜烈의 부친, 강인원姜仁源의 큰아들로 애월읍 곽지리<과-오름> 지에서 태어나 1923년 의생시험 합격, 특히 임파선 결해적출結咳摘出 수술에는 독보적인 명의였다.


그 아들 강황열도 의사가 되었으며 부전자전으로 수술을 잘하여 명의 2대를 이루었다.


수술로 결핵성 임파선염을 고칠 수 있다고 알려져 전도에서 몰려온 환자들이 줄을 이어 순번을 기다릴 정도였다.


더구나 애월면 일대에서는 많은 의료인들이 배출되어 우연의 일치인지 이러한 속설俗說을 크게 뒷받침하고 있다.


애월리에서 개업하였는데 일개 시골 의생이 전도적으로 명성을 떨쳐 전설처럼 오래 기억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루는 담석증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사경에 이르러 찾아온 환자의 소원에 따라 집도, 몇 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담석을 적출하는데 완치시켜주었다.


지금도 곽지리에는 이 마을에 의성醫星이 비쳐 의술에 능통한 사람이 나온다는 속설이 있으며 마을 노인들은 그 명의가 바로 강봉희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의문당이라는 글씨는 대정향교 훈장 강사공의 요청에 의하여 추사 김정희의 필筆로 전해지고 있다. 현판의 후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道光 二十六年 丙午 十一月 日 晉州後人 姜師孔 請,謫所 前 參判 金公正熙 題額 謹揭.

▲강사공姜師孔:1772(영조48)~1863(철종14), 선비. 대정향교 훈장, 호는 한정寒井. 본관은 진주, 대정읍 일과리<날-웨>의 강재필姜載弼 아들로, 대정향교의 훈장으로 문장도 뛰어났다.


 또 1811년(순조11)에 대정현감 변경붕邊景鵬이 액자로 만들어 대정향교 명륜당에 게시한 것을 본받기로 하여 추사의 글씨를 향교에 게시하였다.


그리고 1840년(헌종6) 대정에 유배를 온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의문당疑問堂이란 글씨를 받아 이를 액자에 담아 대정향교의 동재東齋에 게시하였다.


앞서 대정향교 훈장 강사공은 사재를 들여 헌관의 제복을 마련하고 대성전 뜰 양쪽에 소나무 두 그루를, 또 명륜당 앞에는 백일홍 나무를 심었다.


※첨기=대정향교 훈장 강사공의 청請에 의해 써진 추사의 글씨인 ‘의문당疑問堂’, 수량:1점·규격:78.5㎝×35.3㎝·연대:1846년·소유자:대정향교(안덕면). 대정향교는 1416년(태종16) 대정현 관내에 창건되고 목사 이원진에 의해 1653년(효종4) 현재의 위치에 이건移建되었다. 향교의 주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었다.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殿閣이며 동재와 서재는 강당講堂이었다. 의문당은 동재의 별칭으로 유생들이 학문에 정진하던 곳이었다. 의문당이라는 글씨는 훈장 강사공의 요청에 의하여 추사 김정희의 필筆로 전해지고 있다. 현판의 후면은 다음과 같다. 道光 二十六年 丙午 十一月 日 晉州後人 姜師孔 請, 謫所 前 參判 金公正熙 題額 謹揭.

 

▲강상문姜相文:1918~2011. 애월읍 상가리<웃더럭>에서 강택수姜澤洙의 외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부친이 돌아가시고 독학으로 한학에 열중하면서 광복 후 타 마을에서는 서당이 단절되었으나 자택을 마을 학당으로 삼아 훈학에 힘썼다.


4·3사건 당시 마을 이장을 거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여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고 틈이 나면 서예와 한시 짓기에 열중했다. 


이웃 소길리召吉里 부달선夫達善과 어울려 공맹지도孔孟之道에 매진하더니 부달선이 제물포濟物浦로 건너가 경기도 일대에서 시서詩書에서 으뜸의 자리에 오르자 그저 서신書信으로 우정을 이었고 부달선이 제주에 올 때마다 강상문과 시와 서에 대하여 논하기도 하였다.


실은 성장지 상가리上加里는 강姜·양梁·변邊 등 삼성三姓이 오래 자리잡아 보수적 기질을 길렀고 오히려 하가리下加里는 신학문에 몰두하여 진보적 경향이 뚜렸했다.


이는 1833년(순조33) 봄 제주 목사 한응호韓應浩가 오등리梧登里에 남학南學을, 또 상가리에 서학당西學堂을 세워 훈학처로 삼았다는 기록이 김석익金錫翼의 ‘耽羅紀年’에 등재되어 있다.


강姜·부夫 두 선비는 이런 전통을 이으면서 향공애鄕工愛와 문화를 지켜왔다.


고려대학교 경제학 교수 강성진姜晟振의 선친.


※(알림): 김찬흡 선생의 역저 ‘제주인물대사전’은 현재 시중 서점에서 매진(賣盡)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저자에게 문의 바랍니다. 문의: 064-722-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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