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하원동 여가밭 동산 양지에 누운 임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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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왕자묘의 방묘 1
▲ 봉토로 이루어진 傳왕자묘 1호분. 여러 가설을 통해 백백태자, 남평문씨 남제공파 왕자 등의 묘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傳왕자묘에 대한 기록


전(傳)왕자묘는 서귀포시 하원동, 방애오름 북쪽 ‘여가밭’이라는 작은 동산에 있는 분묘군(墳墓群)으로 3기의 무덤이 동산의 능선을 타고 조성돼 있다.

 

이곳의 행정 지번(地番)은 서귀포시 하원동 산 21번지이다. 이 傳왕자묘에 대한 기록은 1842년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펴낸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대정현(大靜縣) 고적(古蹟)조’에 처음 보인다.

 

“현(縣)의 동쪽 45리에 있다. 궁산(弓山)의 두 내 사이에 3묘(三墓)의 계체(階節)가 아직도 남아 있다. 두 모퉁이에는 백작약(白灼藥)이 있으며, 가래촌(加來村:현 강정동) 뒤에는 또 궁궐유초(宮闕遺礎)가 있다. 이는 탁라왕의 도읍처가 아닌가 한다.

 

속전(俗傳)에 산방(山房)을 제2도(第二徒)라 말한다.” 1899년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현에서의 거리가 40리로 바뀔 뿐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내용과 같다. ‘대정군고지(大靜郡古誌·1899官撰)’, 김석익(金錫翼·1885~1956)의 ‘심재집(心齎集)’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응호(李膺鎬· 1871~1950)의 ‘탁라국서’에 기록은 되새겨볼 만하다. “궁산(弓山) 서쪽에 3기의 방묘가 있는데 계체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두 모퉁이에는 백작약(白灼藥)이 있다. 가래촌(加來村·현 강정동) 안에는 궁궐유지(宮闕遺址)가 있으며, 또 군산(軍山) 안에 한 원묘(圓墓)가 있는데 매우 견고하다. 살펴보건대 이 두 곳은 무덤이 황폐해진지 오래되었다.

 

대개 양(梁)·고(高)·부(夫)·문(文) 4성(四姓)이 되어 이 나라에 사는 자 마땅히 걱정거리가 없음만 못하다.”


이 기록은 모두 지명에 착오가 있지만 3기의 방묘가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모두 傳왕자묘를 말하고 있으며, 현재의 하원동 산 21번지를 가리키고 있다. 특히 이응호의 기록은  양(梁)·고(高)·부(夫)·문(文) 4성(四姓)과 연관 짓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傳왕자묘 방묘의 여러 설


3기의 방묘로 전(傳)해오는 왕자묘는 누구의 묘인가가 중요한데, 지금까지 이 묘가 누구의 묘인지 여러 사람이 주장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 설들은 일명 김태능설, 김인호설, 강창화설(발굴조사 견해), 문기선 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김태능(金泰能)은 ‘원순제 피난궁지(元順帝避難宮址)와 백백태자(伯伯太子)의 墓(1991)’라는 글에서, 운남 양왕의 아들 백백태자(伯伯太子·? ~1404)의 묘의 근거로 “분묘 양측에 조면암으로 조각된 문관석상의 관복(冠服), 관대(冠帶), 손가락과 관복(冠服) 소매 주름 조각상태, 관모(官帽)의 조각이 제주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문관석상(文官石像) 관(冠)과는 그 모양이 다르다” 것이다.

 

즉 복식이나 조각 수법 면에서 흔히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조각이 아니라는 것이 김태능의 주장이다.


김인호(金仁顥)는 ‘濟州島 古墳에 대한 一見解(1995)’라는 글에서, “석인상의 돌이 제주에서 흔히 ‘먹돌’로 불리는 아주 딱딱하고 미끄닥한 냇돌이었고, 복식형태나 특히 홀(笏)의 크기, 그것을 잡은 손의 위치가 제주도 산소에서 보는 것과 크게 달라 특이한 감을 준다.” 고 했다.

 

그는 말 무덤(馬塚)을 함께 조성한 점, 한국이나 제주도 양식이 아닌 특이한 무덤과 문인석 등을 들어 백백태자 묘라고 주장한다.


강창화는 ‘濟州 河源洞 墳墓群(2000)’에서, 분묘군이 최근까자 고씨 집안에서 관리해 온 점을 들면서 문충걸(文忠傑)의 사위가 고봉례(高鳳禮)라는 사실을 들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우고 있다.

 

즉, “1601년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에 문충기(文忠基)가 연루됨으로써 집안이 몰락하자 외손에 의해 분묘가 관리된 것은 아닐까?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면, 이 분묘와 남평문씨와의 관련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3기 분묘의 주인공은 남평문씨 남제공파 왕자직 역임자인, 文昌祐, 文昌裕, 文公濟, 文臣輔, 文忠傑, 文忠甫, 文忠世, 文承瑞 중 어느 누구일 가능성이 있으며, 2대에 걸친 묘역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응호의 4성(四姓)에 주목한 듯 고(高)와 문(文)씨를 연관 짓고 있다. 


문기선은 ‘제주 최초의 석상 조성적 조명 연구보고(2003)’라는 글에서, “몽골인 복식 유풍이 남아 있고, 관두의(두루마기)를 입고 긴 방장대를 들고 있으며 (…) 북방형 발립(鉢笠)을 쓴 채 여막살이 하던 모습을 석상으로 조성 (…) 제주도 일반적인 석상과 크게 다른 것이 특징이다.” 라고 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전해오는 유리원판 자료가 ‘가래천변 장군총 출토유물’이라고 명명돼 있어서, 이 무덤은 남평 문씨 왕자들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기선의 주장은 강창화의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근거로 심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 방묘의 기원과 흐름으로 봤을 방묘가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매우 중요하다.

 

아직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연구된 내용을 종합했을 때 방묘는 대략 세종 22년(1441)에 출생한 청주한씨의 한계노(韓繼老·1441~ ?) 부부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묘제 형식은 봉토로 이루어진 방묘이다.

 

마지막 탐라성주 고봉례(高鳳禮·? ~1411) 부부의 방묘 형식은 傳왕자묘와 같은 석곽 방묘의 양식이다. 아무튼 제주도 방묘는 세종조  까지 조성되었으며, 이후 원묘(圓墓)로 대체되는데 방묘에는 산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 1914년 발굴된 탐라왕자묘 유물 원판 사진.

▲눈길끄는 傳왕자묘의 석상


傳왕자묘 문인석 1기가 어떻게 제주특별자치도자연사박물관에 있는가는 문기선의 글에 언급돼 있다. “비교적 온전한 한쪽 문인석상은 누가 가져갈 요량으로 제자리를 벗어나 굴러다니던 것을 만농 선생과 이영배 관장이 어렵게 발견하고, 남제주군청 문화공보실장에 위탁하고 다시 옮겨져 현 제주민속박물관(현 제주특별자치도자연사박물관 자리·필자)에 이관·보존하고 있다.” 는 것이다.


傳왕자묘역에 있는 3기의 분묘와 문인석은 2000년 제주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석상이다.

 

이 석상은 전장 105cm 넓이 37cm, 두께 26   cm이며 홀 또는 방장대의 길이가 50cm로 무척 긴 편에 속한다. 목이 소실된 문인석은 전장 60cm, 얼굴 있는 문인석에 비해 홀(笏) 또는 방장대의 길이가 조금 길다.


석상은 누가 보아도 한국풍이나 제주도 풍이 아닌 이국풍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기는 모자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이마 위에 모자 하단부가 띠처럼 남겨져 있다.

 

옷은 소매가 길고 두 손으로 긴 홀을 중앙에서 받쳐 들고 있다. 홀을 잡은 손의 모양은 목 있는 석상이 오른손을 올리고 있고, 목 없는 석상이 왼손을 올리고 있다. 이 두 석상을 마주 세우면, 음양의 균형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신체는 좌와 우,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쌍을 이루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좌(左)와 우(右)’라는 글자도 금문(金文)으로 보면, 서로 대칭을 이루는 글자가 되는데 두 개를 포개면 데칼코마니 한 것처럼 형태가 딱 들어맞는다(岩田慶治·2005). 이것을 '대칭의 법칙(low of symetry)'이라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체나 동물들이 대칭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정상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불안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G.V. Plekhnov, 1989). 그래서 인체석상이나 동물석상을 좌우로 세울 때는 각기 다른 손이 올라가도록 만들어야 안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연에서 배운 대칭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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