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현 선생 외 3명이 1974년 12월 24일 하원동 여가밭 傳왕자묘 현장을 찾은 모습. 온전한 석상 1기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의인들의 노력에 의해 지켜지는 역사

 

역사는 관심이 있을 때 지켜지고 우리의 미래 또한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

 

전 왕자묘의 문인석이 오늘날 제주특별자치도 자연사박물관까지 옮겨진 경위에 대해 정수현(前 남제주군청 공보실장, 1938년 생) 선생으로부터 당시의 모습과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왕자묘의 석상 1기를 옮기게 된 이유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1970년대 당시만 해도 도굴이 심했지만 관이든 민간에서든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매우 희박했기 때문에 그냥 들판에 놔둬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우선은 안전한 곳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 정수현 선생.

당시 남군 공보실장이었던 나는(정수현 선생) 1974년 겨울, 전 왕자묘 현장을 다녀 온 후 이듬 해 초 공보실 직원이었던 양창돈 등과 함께 다시 왕자묘를 찾았죠.

 

그 때는 지금처럼 길이 좋지 않아 생작(돌길)으로 어렵게 도착한 곳이 여가밭이라고 부르는 장소의 방묘(지금의 1호분) 앞이었고, 그 방묘를 보니 봉분이 심하게 파헤쳐진 채 광중(壙中)에는 숯만 가득 있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풀이 우거진 사이로 판석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는데 무덤 앞에는 석상이 2기가 있었습니다.

 

석상 하나는 온전한 채로 그대로였지만 다른 하나는 목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습니다.

 

이 중 온전한 석상 하나라도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훗날 이 무덤이 누구의 것인가를 규명할 수 있으라는 기대와 함께 현장의 증거가 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같이 갔던 네 명이 석상을 들어 당시 관차에 옮겨 싣고는 남제주군청으로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1975년 9월 1일 자로 민방위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2년 뒤인 1977년 2월 18일 이후, 남군 재무과장을 지낼 당시 현치방 군수가 그 문인석을 보고는 아주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없어 군청에 보관하던 문인석이 자리에 없는 것을 알고 궁금해서 공보실에 가서 물어보니, 공보실 직원이 당시 제주도 민속자연사 박물관의 이영배 민속연구원(前 제주도자연사박물관장)이 와서 인수해 갔다고 했고, 그 직원은 혹시 석상이 옮겨진 사유를 잘 기재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석상의 이런 경위에 대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 운전사였던 고 김태삼 씨, 양창돈 씨, 고창후 씨와 제가 있습니다.”

 

▲한국의 이국풍(異國風) 석상들

 

무덤을 지키는 한국의 대표적인 이국풍 석상은 통일신라시대 경주 괘릉의 무인석과 문인석상이라고 할 수 있다.

 

괘릉의 무인석은 이란인이고 문인석은 위구르인이다. 그러나 이 양식은 이후 전래되지 않은 채 괘릉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또한 경기도에 있는 이애(1363~1414)와 태조의 8남 5녀 중 맏딸인 경신공주 무덤의 무인석은 몽골의 복식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석상인데 한눈에 봐도 이국풍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주의 傳왕자묘 문인석상도 숱한 한국 무덤 석상 가운데 희귀한 이국풍이다.

 

원래 한국의 문·무인석은 당나라의 묘제에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시대에 정착되었다.

 

이것이 고려에 계승되면서 공민왕릉의 묘제(墓制)로 양식화되었고, 이 묘제는 이후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

 

무덤 앞에 석상을 세우는 전통은 후한(後漢)의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는 상(商)·주(周) 시대부터 있어온 순장(旬葬) 풍습에서 유래한다.

 

한(漢) 나라《수경주(水經注)》<유수(流水)>에, ‘비 옆에 석인 두 개를 세웠고, 여러 석주(石柱)와 석수(石獸)가 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후한의《풍속통의(風俗通義)》<신괴편(神怪篇)>에, ‘묘 입구에 석인(石人), 석수(石獸)가 있다’고 했다. 물론 전한(前漢)시대부터 무덤에 석물을 세웠다.

 

그러나 그때의 석물은 석주(石柱)라고 부르는 돌기둥인데 석표(石標)라고도 불렀다.

 

후한(後漢) 낙안태수(樂安太守) 묘 앞에는 두 개의 석인상이 있다. 이 두 석인상의 몸에 ‘漢故樂安太守표君亭長’ 과 ‘府門之卒’이라고 새겨진 것으로 보아 묘를 지키는 경비병이다.

 

석인상이 문인과 무인으로 구분하여 배열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인데, 8세기 후반에야 문인석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楊寬, 2005). 한국 무덤의 석인상들은 지역마다 약간씩 특징이 있을 뿐 이국풍의 석인상은 보기가 드물다. 특히 제주의 傳왕자묘 문인석상은 그야말로 여타의 지방의 문인석보다 독특하다. 그렇다면 이런 이국풍의 석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 傳왕자묘 문인석.

▲傳왕자묘 석상의 이국적 풍모

 

傳 왕자묘의 석상은 기본적인 도구로 제작된 서투른 민간 석공의 솜씨다.

 

석상 전체의 기법은 거칠게 다듬은 후 필요한 부분만 선각(線刻)으로 강조한 졸렬한 표현에 그치고 있다.

 

특히 석상의 의상의 주름, 대(帶), 손, 홀, 귀, 단령(團領, 둥근 옷깃) 만을 선각으로 묘사했다는 것은 도구와 솜씨, 제작 기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석상 전체를 보면 자연석을 가공한 것이 매우 거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통 뒤편에는 단순하게 석재를 떼어내기 한 흔적이 보인다. 넓은 면으로 대충 털어낸 채 자세히 다듬지 않고 그냥 둔 것이다.

 

눈과 얼굴 부분은 앞서 말했던 원시적 기법인 ‘쪼아 파기 방법(循石造型)’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 석상을 만든 민간 석공의 솜씨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 가까이 둥근 깃을 표현한 것, 복대를 두른 것, 홀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복두(幞頭)에 공복(公服)을 입은 상이다.

 

홀이 긴 것, 홀을 잡은 손이 얼굴이나 몸체에 비해 턱없이 왜소한 것은 석공이 아마추어라는 사실임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비례 감각이 없고, 오로지 선(線)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집중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조 된 것(홀)과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손)에의 차이가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런 고졸함이 민간석공이 만든 석상의 매력이 될 수도 있다.

 

홀은 관리가 조회(朝會)시 관복을 입고 손에 지니는 일종의 수판(手板)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대(周代)부터 사용되었다. 원래 홀은 임금에게 주청(奏請)할 내용을 간단히 적는 것이었으나 점차 의례용 장식품으로 변했다.

 

크기는 1자(33cm) 정도. 송나라 제도를 받아들인 고려 때는 그보다 더 길었다. 품계에 따라 1~4품까지는 상아홀을, 5품에서부터 9품까지는 나무홀을 잡았다. 손에 잡는 하단부는 비단으로 둘렀다.

 

傳왕자묘의 석상의 홀은 상례 때 상주가 집는 방장대(상장대)라고 하지만 방장대는 중앙에 잡지 않는다. 단지 이런 표현은 누구에게 들어서 표현하다 보니 과장돼 버린 민간석공의 솜씨에 불과하다. 손의 표현이 어린아이 손처럼 돼 버린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