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16으로 첫 민선 도백 '大제주 건설' 공약 물거품
(12)5·16으로 첫 민선 도백 '大제주 건설' 공약 물거품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7.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성건, 이승만·김구 노선 사수…교황 봉사상 등 수훈
서귀면장 강성모, 친일파 민족반역자 조사위원 활동
11대 道지사 강성익, 난민구호 역점·남주학원 설립

▲강성건姜成健:1915(일제강점기)~2006, 천주교 신도 및 신부의 항일 활동. 제주도의회 의장. 제주 광복회장. 본관은 진주, 호는 송암松庵.  서귀면 동홍리<동-홍로>에서 강문옥姜文玉의 아들로 태어나 조부의 영향으로 홍로성당에서 어린 때에 세례를 받았다.


1934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했으며, 일제강점기 외국인 신부들과 천주교 신자 수명에게 군사 기밀을 누설했다고 해서 1941년 10월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법에서 소위 국방 보호법 및 군사 기밀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과 육군 형법·해군 형법 위반으로 금고 10월형이 병합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7년 4월 서귀포 성당에서 대의원 138명이 모여 남제주군 독립청년회를 결성, 명예 의장에 이승만, 김구를 추대, 도위원장에 강성건을 선출했다.


이어 대동청년회 제주도지부가 동년 10월 2일에 결성, 위원장에 김충희金忠熙, 부위원장 김덕준金德俊, 강성건 등을 선출하고 집행위원에 고원찬高元燦 외 38명, 또 상임위원 11명을 선임하였다. 동년 10월 18일에는 대동청년단 남제주군지단支團 결성식에 대의원 70여 명이 참석해 위원장 강성건, 부위원장 강기완姜基完, 김문숙金文淑이 선출되었다.


1947년 12월 21일 대동청년단 제주도단 단장 김인선金仁善 휘하에 있는 각 읍면 지도자의 면모를 보면 애월면 김선희金瑄熙, 한림면 차명택車明宅, 김영진金榮珍, 양병직梁秉直, 대정면 강필생姜必生, 안덕면 양인수梁仁洙, 서귀면 부윤경夫允敬, 표선면 송방식宋邦植, 조천면 한재원韓在源, 구좌면 김도준金道準 등이다.


이들은 후일 신임을 얻어 국회의원 혹은 도의원으로 진출된 인사들이 많았다.


1948년 강성건과 오도현吳道顯이 민주독립당을 탈당하여 이승만李承晩박사와 김구金九주석의 노선을 사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50년 4월 1일 제주도 청년방위대를 조직, 1개월간의 군사 교육을 거쳐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본도의 방위대장은 방위중령 강성건, 부副대장 방위소령 홍인표洪仁杓, 대원은 도내에 총 2만 명에 달하며, 도내 방위청년들은 군복에 무궁화 견장肩章을 달고 다녔다.


이 청년 방위대가 조직되고 2개월도 못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징집 연령에 해당되는 대원과 지원병은 군문으로 입대하여 전선으로 향했다.

 

지방 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먼저 각 시·도 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본도에서는 1952년 5월 10일 제주도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 중선거구 제도에 의한 선거여서 북제주군에서 13명, 남제주군에서 7명을 선출하게 된 바, 그는 남군에서 당선되었다.


초대 의장 선거에 들어가 전인홍全仁洪이 14표로 당선되고 차점은 김영린金永璘이 4표에 그치고, 부의장에는 강성건 12표로 당선,  차점은 김찬익金贊益이 6표를 얻는 데 그쳤다.


1956년 8월 13일 실시, 그는 남제주군 제4 선거구(서귀읍)에서 재선의원이 되었다.


의장 선거에서 강재량康才良 8표, 강성건 5표로 의장 도전에 실패하였다. 1958년 제10회 도의회에서는 강재량 의원이 제4대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하기 위해 사퇴하자 새 의장을 보선하는데 그가  의장에 당선되었다.


1965년 1월 16일 서귀읍 개발위원회가 조직되어 앞으로 시市로 승격하는 일에 앞장서서 위원장으로서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면서 한편으로는 서귀 지구 인문계 공립 고등학교를 개설하기 위하여 설립 신청서를 강성건 외 92명의 명의로 제출한 것을 제28회 제주교위에서 의결하고 문교부에 전달했다.


1972년 4월 제주도 감귤 협동조합장으로 피선되어 3년을, 대한 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부회장으로 15년을 지냈다.


 1983년 2월 로마 교황청 교황 ‘요한 바오로’로부터 봉사상을, 또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 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 김찬흡 선생이 1992년 서귀포여고 교장 재직 당시 발견한 강성모 추모비.

▲강성모康成謨:생몰년 미상. 서귀면장, 한문으로 쓰여진 추모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광복 후 친일파민족반역자조사위원, 모 사건으로 수장당함.


그의 추모비가 서귀포여자고등학교 정문 앞 일주도로변 길가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강성익康性益:1892(고종29)~1968, 사업가, 제11대 제주도지사(民選). 호는 남주南洲. 본관은 신천,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나 젊은 때 법환리 일구一區 구장을 거쳐 1918년 서귀포 항구에 단추공장을 세워 사업을 일으켰다.


그는 상당한 부로 ‘산남의 강성익’, ‘산북의 박종실朴宗實’이란 말을 들었다.


1926년에는 서귀포와 모슬포 간, 또 서귀포와 성산포 간을 운행하는 남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30년 4월 서귀금융조합의 조합장에 당선, 또 1937년 5월 10일 실시한 전라남도 도회의원道會議員에 이윤희李允熙(제주성내)와 함께 당선되었다. 1942년 7월 제일전분주식회사를 창업, 또 1943년 제주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조국이 해방되자 오직 운수업과 전분업에 온 힘을 쏟던 중 1947년 10월 25일 서귀제빙공장 설치에 대한 촉성회를 조직해 서귀면민들은 위원장에 강성익, 부위원장에 이원옥李元玉 등 2명을 선출했다.


1950년 5월 남제주군수로 임명되었다. 3년 4개월 동안 재임하니, 이때 처음으로 관직에 몸담아 4·3과 6·25로 난민구호에 역점을 두었다.


한편으로는 육영사업에 뜻을 두어 학교재단 남주학원南洲學園을 설립하여 1956년 2월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고 동년 7월 남주고등학교를 개설, 초대 교장에 큰 사위 김계용金継鏞(전 제농교장)을 임명하고 얼마 후 부설 남주중학교까지 개교하였다.


1960년 12월 무소속으로 도지사 선거에 입후보하여 ‘대제주大濟州 건설’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한 뒤 집권 민주당의 공천자 김선옥金善玉과 겨루어 1,246표 차로 누르고 첫 민선지사에 당선되었다.

 

1961년 새해 벽두 강 도백은 제주는 앞으로 40~50년 후가 되면 인구 1백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보아 ‘대제주 건설’이란 구상을 발표하였다.


“서울까지 30시간 걸리는 연륙連陸 교통을 13시간으로 단축시키겠다. ”


그는 어느 정당에도 관계하지 않은 영원한 무소속으로 남겠다고 선언하면서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자신의 ‘대제주 건설’의 거보를 내딛기 시작했다.

 

▲ 여객자동차 1925년 첫 등장

며칠 후 제주출신 국회의원 5명은 강 지사의 공약을 받아들여 대정부 건의안 전문을 보내었다. “정부에서는 제주도와 육지부와의 연륙대책 수립을 위해 1962년도 예산부터 제주도를 인구 1백만 명 이상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으로 개발해 주기 바라며, 그 방안으로 완도와 영산포간에 철도를 부설하고, 완도항을 5백 내지 1천 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항구로 개발하고, 제주-완도 간을 속력 15노트 이상의 선박으로 취항시켜 2시간 반 내지 3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강 도백은 1961년 5월 15일에 서울로 출장, 내무부와 교통부에 제주도 현안문제를 절충하고 있었는데 5월 16일 새벽 무장군인과 탱크들이 출현한 사실을 라디오로 통하여 듣고 정국의 급한 변화를 알았다. 이 날 제주에는 ‘제주지구계엄대행사무소’가 설치됐다. 5·16으로 강 도백은 ‘대제주 건설’이란 꿈도 실현하지 못하고 이임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