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나만 어찌 부귀영화를 누리랴” 세종도 꺾지 못한 푸른 절개
(51)“나만 어찌 부귀영화를 누리랴” 세종도 꺾지 못한 푸른 절개
  • 제주신보
  • 승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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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 허씨 입도조 허손의 원묘
▲ 구좌읍 종달리 소재 양천 허씨 입도조 허손의 묘역. 두산봉의 지맥을 끌어오고 지미봉을 안산(案山)으로 삼고 있다.

▲양천 허씨의 성


양천 허씨 입도조가 된 허손(許愻)이 낙향한 것은 조선이 개국한 해인 1392년이다

.
이때 김해 김씨 김만희(金萬希)와 청주 한씨 한천(韓薦)이 비슷한 시기에 유배되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사실상 조선의 개국은 고려 말 부패한 사회를 뒤 엎은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다.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끝나는데 같은 시기에 한 국가의 멸망은 비극이 되고 한 국가의 발흥은 희극이 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의 힘은 민(民)에서 나온다.


비록 민족이라는 것이 상상의 공동체일지라도 국가는 그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지탱하며, 민족이라고는 하지만 계급 간 국가를 장악하고 유지하려는 권력 투쟁을 벌인다.


국가는 민의 힘이 약해질수록 민주주의에 반한다. 현재의 역사적 교훈이 바로 ‘이성이 잠들면 언제라도 다시 요괴가 눈 뜨는 형국’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한시라도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빨리 반복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허손(許愻)은 고려조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인물로 이성계가 조선 개국을 위해 대제학 등용을 약속했지만 그 회유책을 거부하고 당당히 먼 바다를 건너 유배 온 선비이다.


출세보다는 명분의 의리를 지켰다.


허손은 고려의 명문 집안의 후손으로 시조(始祖) 허선문(許宣文)의 15세손이다.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 1595~1682)은 허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선생은 한양(漢陽)의 동쪽 성곽 아래에서 태어났다.

 

허씨(許氏)는 본래 가락(駕洛) 수로왕(首露王)의 먼 후예이다. 신라 말세(末世)에 허선문(許宣文)이라는 분이 있는데, 나이 90여 세에 고려 태조를 섬겨 공암 촌주(孔巖村主)가 되었다.”


이어 미수는 “공암촌주(孔巖村主 허선문許宣文) 이후부터 보첩(譜帖)에 드러나서 갑족(甲族)으로 불렸으며, 성씨(필자:양천 허씨)를 얻은 이래 26, 7대로 무려 7백 여 년(필자:당시 허목의 기준)이나 된다.


<설부(說部)>에 보면 허씨는 고려 5백 년 동안에 정승 11인, 관추(莞樞:중추원사(中樞院使))가 6인, 학사(學士) 9인, 부마(駙馬:왕의 사위) 5인, 원(元) 나라에 벼슬한 이 1인, 봉군(封君) 14인이고, 본조(필자: 허목 때의 조선)에 들어와서는 정승 2인, 찬성 2인, 판서 4인, 공신(功臣) 3인, 학사 12인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인조ㆍ효종 이래로 명신 귀인이 또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았으니, 조선(祖先:先祖)이 인덕(仁德)과 착함을 쌓은 보답이라 할 수 있다”며 미수 자신의 세족(世族)을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공암(孔巖)은 양천(陽川)의 별칭으로 현재 서울 양천구(陽川區) 가양동(加陽洞) 지역이다.


고려 태조(太祖) 때 허선문(許宣文)이 처음 식읍(食邑)을 받고 봉해진 뒤로 양천 허씨의 본관이 되었다.

 

▲ 허손의 무덤에서 바라본 지미봉과 우도의 절경.

▲고려 충절 두문동 72인


허흠의 둘째 아들은 허손(許愻)이다.


대제학 허흠(許欽)은 고려가 망하자 부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켰다.


허흠(許欽)의 큰 아들 허징(許懲, 1344~ )은 고려 충정왕의 사위[駙馬]로 공암군(孔岩君)에 봉해졌고, 병마단련판관(兵馬團練判官) 겸 북도순검사(北道巡檢使)를 지냈다.


허징(許懲)은 고려가 망하자 충절을 지킨 72인 가운데 다시 32인의 수장(首長)이었다.


이들 72인은 송도(松都) 동남현(東南峴)에 모여 관복을 벗어 소각한 다음 헤진 옷과 찢어진 삿갓을 쓰고 망국의 한을 목 놓아 울고는 정처 없이 가다가 북도(北道)에 은둔하였고, 그 뒤를 따라가던 아버지 허흠 부부는 북도목우장(北道牧牛場)에 이르러 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


이에 후세의 사람들이 이들이 살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칭하고 이들을 두문동 72인 절사(節士)라 불렀다.


오늘날 세상에 나가지 않고 칩거하는 것을 두문불출(杜門不出)라고 하는 것의 어원인 셈이다.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은 절개를 지키거나 죽음으로 충절을 이룬 고려충신들의 관직과 이름을 적은 책이다. 두문동 72인 중 예판봉사(禮判奉使) 김주(金澍)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따르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는 말을 남기고 중국 절강성에서 살다 죽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충절을 말할 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근원이 김주(金澍)로부터인 것이다.


72인의 벼슬이나 다른 기록은 생략하고 명단만 보면


鄭夢周, 金澍. 李存吾, 鄭樞, 崔瀁, 吉再, 南乙珍, 林先味, 元天錫, 曹義生, 孟裕, 都膺, 李思之, 陶東明, 金自粹, 張安世, 程廣, 韓哲沖, 羅天瑞, 李明成, 李穡, 鄭地, 河自宗, 李養中, 金震陽 , 安省, 李思敬, 趙忠, 許徵, 崔文漢, 申德隣, 孟希德, 裴尙志, 李繹, 李行, 邊肅, 金光致, 李種學, 李陽昭, 閔楡, 文益漸, 林貴椽, 曹希直, 金士廉, 金承吉, 趙瑜, 金濟, 趙鐵山, 范世東, 具鴻, 尹忠輔, 成思齊, 金沖漢, 朴門壽, 閔安富, 蔡王澤, 宋皎, 崔七夕, 金子進, 趙胤, 金若時, 鄭溫, 李涓, 宋寅, 郭樞, 蔡貴河 등이다.

 

▲허손의 제주입도
1392년(태조1) 8월 부모를 불귀의 객으로, 형을 북도로 떠나보낸 허손은 천호(千戶)였던 아들 허우(許雨)와 함께 조선에 불복한 죄로 제주에 유배 오게 되었고, 구좌읍 종달리에서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때 남긴 허손의 시는 형제 간 이별의 정한(情恨)이 가득 차 있다. 허손은 1354년 공민왕 때 송도에서 출생했다.


천성이 따뜻하고 강직하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이다.


1376년 전시문과(殿試文科)로 제학에 임명된 후 다시 대제학의 벼슬에 올랐으나 그 벼슬을 마다하고 황량한 남쪽 섬으로 온 연유가 오죽했으랴.


부모는 울분 때문에 돌아가시고 형은 앞날을 기약 없는 가시밭길을 갔는데 자신만 임금을 바꿔 부귀영달(富貴榮達)을 누릴 수는 없던 까닭이었다.


허손은 제주도에 은거하던 1419년에 세종은 다시 허손에게 좌찬성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조선에 입조(入朝)하지 않고, 1423년 7월 ‘충효를 가문의 전통으로 삼고 세상에 대해서 청렴결백(淸白) 하라’는 선조들의 교훈을 엄수하라는 한 장의 유서를 남기고 71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서슬 푸른 성품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현재 허손의 묘지는 원묘이다. 구좌읍 종달리境 매망 루에 있다. 매망 루란 말(馬)을 방목하여 그 말을 감시하는 동산을 말한다. 그래서 지형 자체가 세 방향이 훤히 보이는 높은 동산이다.

 

허손의 무덤은 원래 고려시대 양식인 방묘였으나 후대에 도굴 우려 때문에 문중에서 원묘로 고쳤다고 한다. 허손의 무덤은 전해오는 설화에도 원래 방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매망 루는 ‘허가골총’이라는 지명으로도 불렸는데 허손의 무덤인지 몰랐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어느 소금 장수의 말 중에 ‘허가골총’이라는 지명이 거론되는 바람에 양촌 허씨 입도선묘를 찾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양촌 허씨 입도조 묘역은 1973년 성역화 사업으로 오늘에 이른다. 허손의 무덤이 있는 이 매망 루는 한라산을 조종산(祖宗山)으로 그 맥이 동쪽의 제1음택 명혈지 사라악으로 내려 성판악, 백약이, 좌보미, 동거문오름을 거치고 손자봉, 용눈이오름, 은월봉, 두산봉에 이른다.


허손의 무덤이 두산봉의 지맥을 끌어오고 있고, 지미봉을 안산(案山)으로 삼아 우도의 절경을 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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