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가을에 비로소 빛을 발하는 존재감
향유-가을에 비로소 빛을 발하는 존재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32)송상열.한의사·제주한의약연구원장

지난 주말 오름의 여왕이라는 따라비 오름에 올랐다. 따라비 오름은 특히 가을 억새로 유명하다. 멀찍이서 내려다보는 억새 군락의 물결치는 듯한 풍광도 장관이지만, 가까이에서 살펴보는 제각각의 억새 모양도 이채롭다.

그런데 막상 오름에 올라보니 따라비 오름의 볼거리는 억새만이 아니었다. 바로 가까이 발 디딘 땅의 온갖 다양한 야생화들도 사람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야고, 엉겅퀴, 섬잔대, 이질풀, 산박하, 한라부추, 산비장이, 닭의장풀, 쥐꼬리망초, 등골나물, 나비나물, 개쑥부쟁이….

혹시 이 꽃들의 공통점을 아는가. 모두 보라색 꽃이라는 것이다. 노란 꽃도 간혹 보이지만 가을 따라비 오름의 길가에는 온통 보랏빛이다. 가을꽃은 왜 유난히 보랏빛이 많은 걸까.

따라비 오름의 꽃 중에 잎은 작지만 화려한 외양으로 존재감을 알리는 꽃향유가 있다. 한약재 곽향의 기원 식물인 배초향과 흡사한데, 전초 형태만이 아니라 꽃 모양도 비슷하여 서로 구분이 어렵다. 다만, 배초향은 여름꽃이고 향유는 가을꽃이라는 점과 배초향은 사방으로 돌려나는 반면 꽃향유는 한쪽 방향으로만 꽃이 피는 점이 다르다.

한약재 향유는 향유(Elsholtzia ciliata Hylander) 또는 기타 동속식물의 꽃필 때의 전초(全草)이다. 꽃향유(Elsholtzia splendens Nakai ex F.Maek.)도 향유로 쓸 수 있다.

해표약(解表藥)으로서 표사(表邪)를 발산하는 작용을 하는 향유는 밖으로는 서사(暑邪)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습독(濕毒)을 없앤다. 한마디로 덥고 습한 여름에 좋은 약이다. 외형만이 아니라 이러한 효능 면에서도 곽향과 유사한데 발한(發汗) 효과는 곽향보다 더 뛰어나서 여름철 차가운 기운을 많이 접해 걸리는 감기에 특히 좋다.

꽃향유는 오름 길 옆 양지바른 곳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잎새가 미약하여 평소에는 존재감이 없는 탓에 지난 여름에 따라비에 올랐을 때는 꽃향유를 의식하지 못했다. 사실 따라비의 가을꽃 대부분이 그랬다. 봄도 아닌 가을에 이렇게 화려한 꽃들을 볼 수 있을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앞 다투어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낼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 뒤늦게 화려한 성공으로 주목받게 되기도 한다.

이제 쉰을 앞둔 필자는 근래 들어 옛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부쩍 나이 듦을 실감하고 놀라는데, 무엇보다 변변치 못한 환경 속에서 젊은 날의 기나긴 역경을 딛고 뒤늦게 성취를 이룬 친구들을 만날 때 놀랍고 대견함을 느낀다. 이들이야말로 인생의 가을 무렵에 개화한 화려한 보랏빛 꽃들이다.

내일 당장 오름에 올라 가을 억새를 만끽해 보자. 무엇보다 가을 억새 사이로 피어난 보랏빛 꽃들을 보면서 청춘의 봄이 아닌 서늘한 가을에도 화려한 꽃을 틔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자.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들에 대한 후회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성취에 대한 희망과 의욕이 샘솟을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