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익(康聖翊)은 헌수단獻壽壇을 마련 비碑를 세우고 그 비문에 16자의 한문으로 “聖恩如天 圖報無地謹以設壇 月獻萬壽”라 새겨 북향배례하고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이를 후손들이 헌수각을 세워 잘 보존하고 있다. 헌수각에는 정조에게 제주의 사정을 호소한 상소문도 새겨진 비가 있다.

▲강성익康聖翊:1747년(영조23)~1819년(순조19), 문신, 이조좌랑, 경상도의 사천현감, 비안현감, 성산읍 삼달리(당시 와강臥江리) 사람이다.


삼달리<와겡이>의 입촌 시조 강일명康一鳴의 장남, 자는 오응五應, 호는 명재明齋, 처음 오봉조吳鳳祚에게 글을 배우고 자라나서 지금 제주시 도련동<도련-들>의 주서注書 변성우邊聖遇의 문하생이 되었다.


정결한 곳에 헌수단獻壽壇을 마련 비碑를 세우고 그 비문에 16자의 한문으로 “聖恩如天 圖報無地 謹以設壇 月獻萬壽=임금님의 은혜는 하늘과 같아 그 은혜 갚을 길이 없어 삼가 단을 만들어 달마다 만수무강을 빕니다”라 새겨 북향배례하고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이를 후손들은 삼달리<와갱이> 헌수단이라 하여 잘 보존하고 있다.


앞서 1783년(정조7) 전시殿試에서 문과에 응시해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781년(정조5) 6월 김시구 목사의 남옥濫獄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내도한 박천형이 제주순무안사濟州巡撫按査 시재어사試才御使로 임명되자 내도 본도의 유생들이 시취試取할 때에 그는 응시하여 초시에 급제했다. 


용모가 단아하고 두뇌가 총명하고 지혜가 비범하였다.

 

예조禮曹좌랑과 이조吏曹정랑 등을 지낸 후 청관請官으로 인정받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장령 등을 역임했다.


외직으로는 1800년(정조24) 경상도의 사천현감, 비안현감 등을 역임했고 ‘耽羅賓興錄’에는 양덕, 고산, 정의旌義현감 등을 지냈다고 했으나 다른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경상도 참시관參試官, 왜사접위관倭使接慰官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과 충직으로 명성을 떨쳤다.


사천현감으로 있다가 비안현으로 전출할 때 좌수座首가 쇄마전刷馬錢 400냥을 거두어 주자, 그는 “내가 단기 재직으로 선정을 다하지 못한 것이 유감인데 어찌 쇄마전을 받는다 말인가!”하고 각자에게 환불하도록 하니 “우리 고을의 청렴하신 명관이 떠나신다” 하고 애석해 하였다.


비안현감으로 재직 시에는 박봉을 털어 연비루戀比樓를 신축하고 겨우 노비 둘만 거느리고 빈손으로 귀향했다.


1793년(정조17) 어사 심낙수沈樂洙가 임금에게 “강성익은 몸소 밭 갈고 나무 베어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있다”고 아뢴 것을 보면 그의 효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부모상을 당해서도 애통망극해 하며 거상절차를 가례대로 엄숙하게 치렀다.


1794년(정조18) 제주도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도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각 목마장의 국마國馬 3천여 필이 도난당하거나 아사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당시 목사는 삼읍 각 목마장 목졸牧卒들에게 변상토록 하였는데 겨우 절반을 변상하여 나머지 천오백여 필은 변상할 길이 없어 전 도민이 곤경에 빠지게 되자 그가 상경 입조入朝하여 “제주도에 심한 흉년이 들어 도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어 없어진 국마 천오백여 필을 변상할 능력이 없다”고 실정을 상소하였던 바 정조께서는 도민을 사랑하는 그의 뜻을 찬양하시며 특명으로 국마 변상을 중지하게 하고 구호양곡을 내려 굶주리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혜택을 입게 하였다.


1814년(순조14) 12월 제주찰리濟州察理 겸 위유어사慰諭御使 이재수李在秀가 내도하여 도민의 여론을 듣고 또 지성으로 부모를 섬기며 도리를 다하고 강단을 지어 후진을 계도하는 것을 목격하고 상계하니 관직에 재등용하도록 특명이 내려졌다.


그는 임금의 이러한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였다. 前 제주시장 강창수의 7대 조부이다.


▲강성좌姜聖佐:1651(효종2)~1696(숙종22), 무신. 제주판관.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석무錫武이다.

 

아들은 강욱姜頊, 1677년에 금군초관禁軍哨官으로 무과에 급제, 1679년(숙종5) 7월, 이점李坫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680년 5월 훈련부정으로 제수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제거되고 소론이 등용될 때 별군직에 기용되었는데, 숙종은 보직을 받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를 묻고 이조와 병조에 벼슬을 주도록 명하여 영변부사가 되었으며 임지에서 죽었다.


앞서 제주에 오기 직전 도총도사都摠都事와 내승內乘을 겸직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하동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뒤 풀려나왔다. 묘는 강화도 양도면 삼흥리에 있다.


나홍좌羅弘佐·정홍좌鄭弘佐와 함께 ‘삼좌三佐’로 불렸다. 1679년 허견許堅 등 남인의 모함으로 제주판관에 좌천되었다. 선전관 겸 내승직을 거쳐 오위도총부 도사都事가 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제거되자 훈련원정이 되어 돌아온 뒤 여러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강성준姜成俊:1925(일제강점기)~1997,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학생 항일활동. 제주도부지사. 본관은 진주. 한경면 고산리<차귀> 태생으로 1940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동구 대월정大越町에서 철물상을 경영하던 부친 곁으로 갔다.


당시 제주도 출신으로 고운하高雲河(우도), 김상훈金相勳(월정) 등이 나가시키<長崎>현 현립 간조중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 당국에 모두 체포되었다.


그는 미성년이라 면소되고 고운하와 김상훈은 1943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각기 징역 1년 6월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 건국대학 정치외교과를 졸업, 1958년부터 초대, 2대 제주시의원을 지냈다.


1966년 5월부터 제주도부지사로 2년 반 동안 재임하였다.

 

그 후 경기도 북부출장소장, 체신부 우정연구소장, 체신부 경리국장과 자재국장, 경기京畿체신청장, 부산체신청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감독자상監督者像’이 있다.


▲강세구姜世龜:1632(인조10)~1703(숙종29), 문신. 제주목사. 1685년(숙종11) 4월 김세구金世龜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10월에 파직하였다.

 

목사 강세구의 본관은 진주, 자는 중보重寶, 호는 삼휴당三休堂,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호鎬이다.

 

1678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701년 장희빈張禧嬪을 사사하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홍원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뒤에 복관되고, 회덕懷德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안文安. 앞서 이듬해 교리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서 장원에 뽑혀 승지가 되었다.

 

1685년(숙종11) 10월에 어승마를 선택하여 봉진하지 못한 일로 파직을 당하여 떠났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정언·수찬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1)에 진사가 되고 1676년(숙종2) 강릉참봉康陵參奉에 기용되었으며, 1689년에 충청도관찰사, 1692년 예조참의 등을 역임, 1693년 대사간이 되었다.

 

   
 

▲강세독姜世篤:1890(고종27)~1969, 제주도 최초의 첫 초등 교육자, 애월읍 광령리<광낭-왓>에서 본관 진주, 은열殷烈공파 염통악念通岳계 ‘어강’ 입도 15세손, 강두훈姜斗勳(1861~1901)의 큰아들로 태어나 ‘제주-성안’으로 일찍이 이주, 초기 천주교 가정에서 자랐다.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1916년 경성고보京城高普와 동교 부설 사범과를 졸업, 후일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東洋大學을 졸업, 강세독의 부모는 1901년 신축辛丑 천주교란天主敎難 당시 순교殉敎, 어머니의 세례명은 ‘유리안나’였고 당시 딸 강평국姜平國(초명 강연국姜年國)은 2세, 강세독은 10세, 모두 고아가 되자 천주교에서 이들을 키워 교육을 담당했다.


앞서 또 도내외의 초등교육에 몸 바쳐 정년퇴임한 분이다. 누이 강평국은 본도 여성으로서 최초·최고의 학력소지자다.

 

그는 1911년 제주공립보통학교 4년을 제1회로 졸업, 동년 대정공보교大靜公普校, 또 제주공보교 교사로, 1923년 표선면 성읍리<정의-골>에 개설된 정의旌義공립보통학교 교장 사무취급이 되었다.


그녀는 유명한 항일여성, 1910년 신성晨星여학교에 입학하고 1915년 3월에 제1회로 졸업, 당시 동기생 최정숙崔貞淑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