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남이여! 무슨 원망이 있어 나를 끌어들이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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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산수동 소나무-남수현 후임 강소, 3년간 대정현감 재임 후에 이도
강수오, 법정사 항일투쟁...강수황, 한성부 주부
영의정 강순, 여진 정벌…누명으로 남이와 함께 사형
정의현감 강승 교지·고문서,
▲ 조선 초기의 명장으로 북방의 여진을 정벌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신천부원군인 강순(康純, 1390~1468)장군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를 둘러 보고 충남 보령시 오천면 갈현리에 산수동소나무를 식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영험이 깃든 소나무로 알려져 나무 앞에서 정성껏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고 이 나무에 해를 끼치면 좋지않은 일이 생긴다고 전해진다. 2009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신천(信川) 강씨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충남 보령시 제공>

 

▲강소姜嘯:생몰년 미상, 대정현감. 1722년(경종2) 11월, 남수현南壽賢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25년(영조1) 7월에 떠났다.


이듬해(1725) 4월에는 임인청대壬寅請對사건에 관련, 안옥按獄에 관계되었던 수찬修撰 이현장李顯章도 제주에 유배, 또 동년 6월에는 역시 임인무옥에 관계된 지평持平 윤지尹志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앞서 이밖에 임인무옥의 청대請對와 상소사건에 관계된 서종하徐宗厦와 김요경金堯鏡도 대정현 창천리에 유배되었다. 윤지는 1736년(영조12)에 감등되어 나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1724년(영조 즉위년) 12월에 신임무옥을 일으킨 책임자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을 처참하였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1725년(영조1) 6월 윤지尹志를 대정현에 안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강수오姜壽五:1882(고종19)~1919(일제강점기),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운동. 본관은 진주, 안덕면 사계리<거문-질> 태생. 8년형을 선고받은 강창규姜昌奎의 아우이다.


그는 고문에 의해 1918년 12월 27일 옥중 사망했다. 정부는 1996년 12월 20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일제는 민족 종교인 선도교를 사교 집단으로 매도 격하시켰으며 이 운동을 가혹하게 대처해 나갔다.


앞서 관련자 66명을 3차에 걸쳐서 목포검사국으로 송치하였다.


결국 38명의 봉기 주동자 전부가 체포당하였다.


이러한 항쟁으로 검거된 총인원은 66명으로 대부분 불교도와 선교도들로서, 의병 항쟁 이후 3·1 운동 이전에 국내에 일어난 여러 무력 투쟁 중 대규모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강수황姜受璜:1546(명종1)~?, 무신, 한성부漢城府 주부, 본관 진주, 본시 대원大元강씨의 후예, 강언준姜彦俊의 손자, 강계남姜繼男의 넷째아들이다. 그는 말년에 애월읍 상가리<상-더럭> ‘서-카름’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증보 탐라지’도 1576년(선조9)에 무과에 급제, ‘급제선생안’에는 1636년(인조14)에 급제로 기록, 선조 때 한성부漢城府 주부, 훈련원 첨정僉正에 이르다.


‘호남지’에는 ‘晉州人 武科 主簿’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강순康純:1390(공양왕2)~1468(예종즉위),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태초(太初). 증조부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이다.


갑사(甲士)로 벼슬에 나가 무관이 되었다. 1441년(세종23) 7월에 대정에 도임, 목사는 마정을 관장하고 정의·대정 두 읍의 수령도 목양을 겸임하고 있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첨지중추원사로 있다가, 북방 야인을 다스리기 위해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박천에 나가 북방의 방어에 전념하게 되었다.


1453년(단종 1) 행회령도호부사(行會寧都護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로 전임되었다가, 1458년(세조 4) 다시 첨지중추원사로 복귀해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 판길주목사로 부임했다가 새로 설치된 영북진(寧北鎭)의 도호부사로 전임되어 진(鎭)의 성을 쌓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 뒤 신숙주(申叔舟)의 모련위야인정벌(毛憐衛野人征伐)에 종군해 공을 세우고, 자헌대부에 올라 종성절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뒤, 1465년 중추원사로 전임될 때까지 5년 가까이 북방 방어에 힘쓰면서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세조는 북방 방어에 노력하는 노고를 덜어주려고 처와 함께 부임하도록 특명하였다.


또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을 때는 임기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믿고 교대시킬 더 좋은 인물이 없음을 들어 그대로 유임시키기도 하였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평안도 병사를 이끌고 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과 함께 홍원(洪原)·북청(北靑)·만령(蔓嶺) 등지에서 반란군을 격파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1등에 녹훈되고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이어 서정장군西征將軍으로 남이·이유소 등과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建州衛의 동북쪽 파저강婆猪江 올미부兀彌部의 여러 곳을 소탕하고 추장 이만주를 죽이는 등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명나라 헌종으로부터 은 20냥과 비단을 하사받았다.

 

1468년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으로 오위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반란을 꾀한다는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국문을 받던 남이南怡가 고문에 못이겨 그와 함께 모반에 가담했다고 발설하자 체포되어 남이와 함께 사형되었다.


마지막 강순은 “남이여! 나에게 무슨 원망이 있어 나를 끌어들이려는가?” 하니 남이 대답하길 “원통함은 당신과 나 함께 꼭같다. 그대는 영의정이니 나의 원통함을 더 잘 알 것이다. 고로 당신도 원사寃死함이 옳다” 하였다.


강순은 처자마저 모두 처형되고 가산은 모두 관에서 몰수해 갔다. 1818년(순조 18)이 되어서야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건의로 누명이 신원되어 풀리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우리나라의 성씨 가운데 강씨는 진주강씨晉州姜氏와 신천강씨信川康氏·곡산강씨谷山康氏로 크게 나눈다.


진주강씨는 경상도를 비롯헤 전국적으로 분포한 대성이요, 신천강씨와 곡산강씨는 신천과 곡산은 황해도여서 북한에 많이 산다.


그런데 남한에는 비교적 제주의 산남지방에 살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곡산谷山군은 본시 고구려 십곡성十谷城이요, 신라에 진서현鎭瑞縣, 고려 때에 곡주谷州로 고쳤다.


조선 태조 2년에 강康씨 왕비王妃의 고향이어서 곡산부谷山府로 승격되었다.

 

별칭 상산象山이다. 토착성씨는 6개인데 우禹·노盧·강康·한韓·용龍·연延 등이다.” 또 상게서에 신천信川현 항목에 보면 “본시 신천현은 고구려 때에 승산, 고려에 신주信州로 고치고, 조선 태종 계사癸巳에 신천현으로, 별칭 신안新安이라 했다.

 

토착성씨는 3개인데 강康·임林·이李 등이다.”라고, 제주에서는 동일 입도조로 하면서 곡산谷山강씨와 신천信川강씨를 각기 썼다. 점차 시일이 흐를수록 신천강씨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이래서 대정현감大靜縣監 강순康純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증성이 되고 1468년에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封하여진 것이다.


그러니 두 개의 본관本貫을 고루 썼으니 잘못이 아니다.

 

▲ 강승姜昇 교지敎旨.

▲강승姜昇:1599(선조32)~1659(효종10), 정의현감, 본관 진주, 강황姜璜의 아들, 자는 명언明彦, 호는 송곡松谷, 1618년 무과에 급제, 1648(인조26) 10월 정의현감에 임명되어 송익宋益의 후임으로 착임하고 1649년 9월에 나거拿去되었다.

 

아들 강수제姜壽齊는 유명한 문인文人이었다.


묘는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장지마을 ‘작을산’ 자좌子坐이다.


앞서 최근 강태중이 기증한 현감 강승에 대한 교지와 고문서, 또 진주향안晉州鄕案, 양금신보梁琴新譜 등은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교지와 고문서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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