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와 함께 축제를
추사와 함께 축제를
  • 제주신보
  • 승인 2017.10.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세훈. 홍보대행사 컴101 이사/전 중앙일보 기자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대정고을에 유배 온 3년 뒤인 1843년 당시 선생이 머물렀던 안성리(당시 명칭은 동성리) 인구는 1049명이었다. 그중 남자가 482명, 여자는 567명으로 여자가 8% 많았다. 가구 수는 186호. 인구 상황을 이처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오늘날 호적등본이라 할 안성리의 호적중초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화북 포구에서 대정현까지 추사를 호송했고 초기 몇 년 거처를 제공했던 포교 송계순은 1843년 당시 35세로 노모와 처, 딸 등 4명이 단촐하게 살았다. 이후의 거처인 강효검(강도순 집으로 알려졌지만, 도순은 강효검의 손자)은 1843년 당시 69세였으며 17명의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다.

추사는 55세에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그전까지 그는 부족함 없이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집안은 왕비 쪽과 친척간으로 엄청난 세도가였다. 24세에는 아버지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청나라에 6개월 동안 체류했다. 그동안 당시 청나라 최고 학자들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유하며 조선의 대표 학자 대우를 받았다. 또 금석학 등 새로운 학문을 접하며 조선의 스승 박제가에게 배운 꿈을 되살렸을 것이다. 약관의 젊은 나이에 자부심과 자존심, 패기로 한껏 불타올랐을 것이다.

34세에는 과거에 병과로 급제했다. 여러 벼슬을 하다가 50세부터 55세까지 장관급인 이조판서, 성균관 대사성, 판의금부사(종1품)를 역임했다.

그런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가시 울타리 집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 위리안치형. 그것도 절해고도인 제주의 서쪽 끝 마을. 당시 인구 1600만이었던 삼천리강산을 경영하며 온갖 권세를 누렸던 그가 한순간에 인구 1049명이 사는 동네의 한집에 갇힌 것이다. 50대 중반의 대학자이자 정치가가 자신은 인생의 쓴맛도 잘 안다고 생각했겠지만, 한양에서 직선으로 천리길 이상 되는 절해고도에 묶인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나마 의지했던 부인 예안 이씨마저 그의 유배 생활 2년 만에 죽고 만다. 당시 찢어지는 아픔을 “내세에 서로 바꿔 태어나 나는 죽고 당신은 천리 밖에 살아 남아 당신이 내 슬픔을 맛보게 하리다”라는 시로 토해냈다.

그렇게 비참한 현실에서도 살아내는 길은 예술과 학문을 일구는 것이었다. 예술은 여러 번 복제할 수 없는 것이며, 독창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가 보낸 고립된 9년은 그만의 독창성을 담금질했고, 독보적인 추사체를 만들어냈다.

그의 글씨는 투박하고 균형이 맞지 않는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전의 멋지고 화려한 글씨들을 보면 그렇게 쓰지 못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말년의 추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예스럽고 소박한 고졸함을 추구했다. 기름기를 뺀 단순하고 소박한 예술 세계를 제주에서 이룩한 것이다.

가장 원숙한 시기인 55세에서 63세까지 9년 동안 추사가 겪은 고난과 인고의 시간을 알고 싶지 않은가? 그의 생의 의미와도 같은 불멸의 추사체를 배우고 싶지 않은가? 11월 4일, 5일 제16회 추사문화 예술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을을 눈과 가슴에 담으며 추사 유배길을 걷고, 전국 붓글씨 휘호 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다. 추사 선생의 유배 행렬도 재현되고, 서예 퍼포먼스도 펼쳐진다. 소리패와 풍물패의 공연도 흥겨움을 선사할 것이다.

추사를 흠모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추사가 고난의 결정체로 남겨 놓은 특별한 유산은 이 땅의 후손들의 삶에 값지고 풍요롭게 스며들 수 있다. 우리 모두의 관심과 참여가 풍요로움을 일궈내는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