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승우 흉상. 비석에는 문인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찬삼군신’이란 제목의 시가 새겨져 있다. <동남초 제공>

▲강승우康承宇:1930(일제강점기)~1952, 육군 중위로서 육탄삼용사, 성산읍 시흥리<심돌>에서 태어나 1951년 9월 육군 제5훈련소에서 자원입대하여 갑종간부 제7기로 육군소위로 임관, 1952년 중공군 2개 사단과 대치하던 중에 강 소위는 안영권 하사 및 오규봉 하사와 더불어 육탄 3용사로서 백마고지 탈환이란 신화를 창조해 1계급 특진했다.


1973년 10월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백마고지 3용사의 동상을 건립했고, 앞 큰 글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揮毫이다.


1991년 6월 제주자연사박물관 입구 탐라자유회관에 동상건립 기념사업회 위원장 장정언張正彦에 의해 육탄3용사 동상을 건립했다.


모교인 동남교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었다.


※제주시 자연사박물관에 육탄삼용사肉彈三勇士의 동상銅像을 세워 현양顯揚한 결과 국가보훈처는 2014년 10월의 6·25의 전쟁영웅으로 강승우 중위를 선정했다고 10월 1일 국군의 날에 발표했다.

 

강중위는 백마白馬고지 탈환작전에서 박격포탄과 수류탄으로 온 몸을 무장하고 적진지에 육탄으로 돌진해 산화散華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다.

 

그는 1953년 7월 을지무공훈장에 추서되었으며 미국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강 중위는 1995년 전쟁기념관에서 선정한 우리나라 호국인물 100인에 포함된 바 있다.

 

군대 안에서는 제주4·3사건으로 제주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으나 6·25전쟁으로 이와같이 제주인의 애국심을 널리 알리는 기회로 삼았다.

 

   
 

▲강승추姜升樞:1899년(광무3)~1963. 한학자, 강위청姜渭靑의 아들로 제주시 월평동<랏-쿳>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심일心日, 호는 송암松岩으로 한말의 풍운이 소용돌이치던 그는 단구短軀의 야무진 체격을 지녀 나면서부터 총명과 담력이 출중하였다.


1937년 만주 대련大連으로 건너가 수난을 겪고 상해로 건너가 임정요인과 만났다.


해방 후 이시영李始榮·김홍일金弘一 등과 친교를 맺었다.


앞서 소년시절을 아버지 밑에서 한학공부를 하며 꿈을 키우던 그는 12세 되는 해 나라가 망하자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면학에 정진하고 호남지방을 오르내리면서 명망 있는 스승을 찾아 서도에 연마, 성인이 된 후에는 고도의 수준에 도달할 만큼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대의 석학 정강재鄭剛在에게 사사師事하여 서도를 익히고 특히 간재 전우全愚에게 사사, 경학經學을 공부하고 서도를 더욱 연마,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


나라의 흥망성쇠와 겨레의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눈을 먼 곳으로 돌리고 상해로 망명하기 위해 그 길을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족자를 팔며 국내와 일본천지를 유람하는 유랑의 길에 나섰다.


1934년 일본 ‘츠르하시<鶴橋>’에 그는 일경에 연행되어 곤욕을 치렀다.


▲강승태姜升台:생몰년 미상, 고문서 보관자, 본관 진주, 한경면 저지리<닥-루>에서 강씨 종손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440여 년을 보존해 온 ‘강승태가姜升台家의 고문서古文書’ 수량:500여 점/ 규격:65㎝×84㎝ 외/ 시대:1585년부터 현재까지/ 소유자 강승태(한경면 저지리)/ 재질:저지楮紙, 진주강씨 종손을 대신하여 강승태가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들은 1573년(선조6)부터 조선 말기까지 강씨 일가에 관계된 문서의 전부이다.


토지와 노비문서가 많으나 소지所志, 등장等狀, 원정原情, 가승家乘, 도허문都許文, 화회기和會記, 택일기천기擇日記薦記, 첩장帖狀, 전령傳令, 차사기差使記, 완문完文, 호구단자戶口單子, 장적帳籍(周俠), 분급질分給秩 등 다양한 고문서가 양으로는 거의 500점에 이른다.


확실한 고찰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능하겠지만 강씨가姜氏家가 토족土族으로 자리 잡은 이후의 문서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남아 있는 셈이어서 당시 사회상, 신분제도, 경제구조, 지방 관리의 위계, 향직의 역할, 사문서의 격식 등을 연구하는 데 크게 도움 될 자료이다.


처음에는 군직軍職이다가 후세에 내려올수록 대정현감 등 지방의 청직廳職이라 할 수 있는 교임校任이 많다.


이에 따라 청금靑衿으로 신분이 변화되는데 군역 도역 면제에 관한 문서도 있다.


또 대장大將(목사)이 문묘 석전釋奠에 쓰일 꿩을 1초哨 군졸을 거느려 잡아 바치라는 전령도 눈에 띄인다.


특히 임진란壬辰亂 이전의 문헌이 희귀한데 본 문서들 중에는 만력萬曆 연호, 순치順治(청 태종 연호)도 보인다.


도내에서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가장 완벽하고 방대하게 보존된 私文書라 할 수 있다.

 

   
 

▲강시검康時儉:1924(일제강점기)~1982,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항일 활동. 본관은 곡산, 서귀면 법환리 강성진康性珍의 아들이다.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흥국상업興國商業학교에 들어가 고학으로 학업을 이었다.


동년 12월 27일 일경에 의해 체포돼 1943년 5월 10일 검찰로 송치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되자 귀국하여 제주여자학원의 서무과에 근무한 바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앞서 1942년 7월경 일본 대판大阪의 흥국상업 야간부 학생으로 재학 중 한민족을 위한 독립투사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9월 학우인 이영문李永文·강권우康權佑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이들과 함께 급우들에게 “인도의 독립운동은 학생들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듯이 조선독립운동의 중심은 우리 학생들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파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동년 12월 중순 “우리들은 진정한 반도인半島人이며 개개인이 아닌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아 근로계급입니다. (중략) 학교의 교육방침은 천황天皇에게 충성하고 황운皇運을 받들어 모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총의입니다. 우리들은 일본을 위해 일본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지 반도를 위한 조선적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우리들은 국어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권이 없는 민족의 고유 풍속, 언어의 구제 사업은 희망이 없습니다.”라는 원고를 작성·등사하여 친우들에게 전달하는 한편, 졸업기념 간담회에서 이를 낭독하여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비판하려다 발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