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파도에서
가을 가파도에서
  • 제주신보
  • 승인 201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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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수필가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와 제주도 본섬 중간에 위치한 섬, 가파도. 섬 모양이 덮개 같다 하여 덮을 ‘蓋’자를 써서 개도(盖島)라고도 불렸다.

전체 면적 0.87㎢에 해안선의 길이는 4.2㎞다. 걷거나 자전거로 돌아보기에 알맞은 거리다. 가장 높은 곳이 20m이니 구릉이나 단애가 없는 밋밋한 섬이다. 사방이 훤히 내다보인다. 제주 본섬이 웅장한 자태로 시야를 가린다.

가을에 찾은 가파도. 파란 하늘 아래 도도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 그 어디쯤에 조그만 점 하나 콕 찍어놓은 정물화 풍치다. 청량한 파도만이 나를 반긴다. 때 묻지 않은 해조음이 오롯이 다가와 내 귀에 든다. 자전거보다 걷는 게 편할 것 같아 파도의 리듬에 맞춰 느릿느릿 걷기로 했다.

해변 길 따라 울려 퍼지는 잔잔한 바다의 아리아가 길동무가 되어준다. 파도에 씻긴 바위나 자갈들이 여인의 고운 살결처럼 보드랍게 반짝인다. 그 위에 앉아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명상에 잠겼으면 싶다.

200명 가까이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해안 길은 인적이 뜸하다. 간간이 해녀들의 숨비소리만 해조음에 섞여 흩날릴 뿐. 자전거를 탄 연인 둘이서 나를 따라 오더니 이내 앞서나간다. 평편한 도로에서 바닷바람 가르며 신나게 달린다. 천혜의 하이킹 코스다.

눈감으면 고도(孤島)의 운치를 자아낸다. 다급하게 돌아가는 기계음도, 질주 본능의 자동차 소리도,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는다. 인공이 지배하는 왁자지껄한 도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자연의 속살대는 소리뿐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소요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감춰진 비경은 없어도 완만한 해안을 넘나드는 잔물결의 하얀 포말과 시원한 물보라. 내 안의 삶의 더께를 씻어내기에 충분하다. 하루 이틀 이곳을 거닐다 보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를 듯하다.

해안도로의 유일한 언덕 둔치에 정자가 자리해 있다. 다리도 쉴 겸 안으로 들어앉았다. 가파도에서 나고 자랐다는 육십 중반의 남자가 물질 간 부인을 기다리고 있다. 가파도의 이모저모를 소상히 풀어놓는다. 특히 공해 없는 주거 환경을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랑한다. 2020년이면 풍력과 태양광으로 100% 에너지 자급 섬이 된다니 듣는 나도 부러웠다.

듣고 나니 주민이 된 기분이다. 해안 길을 돌고 나서 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가파초등학교 교정. 여기도 고요만이 나를 맞이한다. 수업시간인 것 같지만 노랫소리도, 책 읽는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한두 명의 아이가 외로이 교실에 앉아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곳의 고요는 참을 수 없는 정적이다. 아이들의 세상은 신나게 뛰어놀며 다투고, 울고 웃고, 떠들썩해야 제격인데….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경쟁이나 복작이는 소란이 더러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는 맛을 느낀다. 살 비비며 사람 냄새를 맡는 삶 속에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다. 고요나 평온의 가치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편안한 삶이나 휴식과 치유에는 고요나 평온만 한 환경 조건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가파도는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에 알맞은 곳이다. 뱃길 10여 분. 삶이 힘들다면 이곳 해변 길을 걸으며 늦가을 높바람에 심신을 벼려볼 일이다.

고요의 섬, 가을 가파도 여정을 매듭지으려니 내 눈은 바다의 풍광을 놓지 못한다. 여행의 맛은 길고 짧음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연찮은 짧은 여행에서 섬광처럼 번득이는 영감이나 감흥을 맛본다. 한나절 섬 나들이로 그런 우연 만나는 게 좀 좋은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