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천강씨 제주입도조 강영의 무덤은 1929년 김달원 지관에 의해 조천읍 소재 일명 ‘대봉림동산’에서 발견됐다.

▲역사의 비극에 선 성씨


함덕의 지명 중 강영개(康永浦)는 함덕 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남쪽이다.


강영개의 유래는 조선 태종 때 태조 이성의 계비(繼妃)의 4촌 오빠이고 전라감사를 지낸 강영이, 왕자의 난 때 유배의 몸이 돼 조천읍 함덕리로 제주에 왔다고 하여 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지명이다.


우리는 조선 초기 역사를 보면서 씁쓸해지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어려울 때 형제가 많으면 서로 돈독하고 집안을 일으키려고 노력하면서 그리 큰 탈이 없지만 재물이든 권력이든 물려받을 것이 있게 되면 형제 많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민간에 작은 재산 다툼도 그리 복잡한데 한 나라를 가지게 될 그 부풀은 야망에 눈이 멀게 되면 어찌 부모나 형제 져버리는 것을 두려워할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욕망들에 희생된 비극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


조선 초기 권력의 욕망은 형제를 비켜가지 않았고 태종이 된 이방원이 그랬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유습(遺習)을 따라 향리(鄕里)에 향처(鄕妻)와 서울에 경처(京妻)를 두었다.


향처가 이방원의 어머니 신의왕후이고 이 경처가 후에 신덕왕후가 된 강영의 큰아버지 딸 4촌 누이 강씨이다.


이성계와 강씨의 인연은 우물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강씨는 대단한 미색이었고 지혜가 있는 여인이었다.


어느 날 이성계가 사냥을 다녀오는 길에 목이 말라 물가에 이르러 어떤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자 그 여인은 물을 뜬 후 물그릇에 버드나무 한 줌을 띄웠다.


이를 본 이성계가 그 이유를 물은 즉,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보아하니 나리께서는 갈증으로 먼 길을 달려오신 것 같은 데 냉수를 급하게 마시게 되면 물체에 걸려 탈이 나실까 봐 일부러 천천히 드시라고 그러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성계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강씨는 본관이 곡산(谷山)으로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조선 건국전에 태조 이성계의 비(妃) 안변(安邊) 한씨(韓氏)가 공양왕 3년 5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는데 이성계가 조선 태조에 오르자 계비(繼妃) 강씨는 현비(顯妣)에 책봉되었다.


비극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의 왕후 한씨는 조선 개국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고 그 슬하에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슬하의 정종(定宗)은 둘째이고, 방원은 다섯째로 후에 태종이 되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방번, 방석과 경순공주(敬順公主)를 낳았다.


태조가 후계자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 신하들은 공 있는 왕자를 세우려고 했으나 이 말을 몰래 들은 신덕왕후의 울음이 문밖까지 들렸다 한다.


이후 신하들은 세자 책봉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얼마 없어 신덕왕후가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는데 대신들이 말하기를 “방번은 광패(狂悖)하고 방석이 조금 낫다”하여 급기야 방석을 세자로 삼게 되었다.


정도전이 주축이 돼 방석을 옹립하고 다른 왕자를 제거할 모의를 꾸미다 일어난 사건이 이방원과 방간이 일으킨 왕자의 난이다.


이때 방석을 옹립하던 정도전이 주살되었다.


▲태종의 보복


개국 4년 뒤 신덕왕후가 1396년에 돌아가시자 정릉에 묻혔다.


개국공신들의 주장대로 국모를 높이는 뜻에서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해 능을 조영했고, 대궐 인근에 흥천사(興天寺)라는 큰 원찰(願刹)을 세워 조계종 본산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대궐에서 아침 재를 올리는 소리를 듣고서 수라를 들었고, 절을 자주 찾아 법도를 살폈다고 한다.


이성계가 매일 아침 종소리를 들으며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었던 이 흥천사 대종은 현재 덕수궁으로 옮겨졌다.


흥천사가 연산군 10년(1504년) 12월 대화재로 소실되자 광화문 종루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다시 창경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있다.


태조의 아픔은 말이 아니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원이 신덕왕후 소생의 방번과 방석을 죽이자 태조는 큰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함흥에 살면서 허무한 세상과 등을 돌렸다.


사람들이 소식을 알 수 없을 때 비유하는 말이 바로 이때 나온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고사다.


1400년 2차의 난으로 방원은 친형 방간을 토산으로 유배보내고, 정종의 왕위를 이양 받고는 태종에 등극한다.


신덕왕후의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의 감정은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데 불만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신덕왕후의 정릉을 1409년 2월 23일 도성 밖 양주(楊洲)로 옮겨버렸고, 자신의 어머니는 종묘에 태조의 옆에 정비(正妃)로 모시고는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지위를 격하시켰다.


구 정릉의 석물 또한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다리를 복구하는데 병풍석을 지지대로 사용하여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그것을 밟도록 하였다.


아버지 태조와 신덕왕후에 대한 철저한 복수다, 신덕왕후의 가족과 친지들은 오죽했으랴.

 

당연히 신덕왕후의 집안은 그야말로 태풍을 비켜갈 수가 없었다.

 

   
▲ 강영 묘 동자석.

▲강영의 제주입도


강영은 고려조에 무관으로 이름을 날렸고, 명문가의 집안으로 태어났지만 당시 전라감사였던 강영의 제주 유배는 당연한 일이었다.


강영은 신덕왕후의 말젯 아버지 강윤휘(康允揮)의 아들이다.


형 상장군 강우(康祐)는 이성계의 큰아버지 이자홍의 사위다.

 

역사는 권력의 향방에 따라 사람의 운명 또한 세운(世運)에 달렸다.


그래서 권력은 한갓 인생에 무상함만 더할 뿐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강영은 태종 2년(1402년) 관직을 빼앗기고 제주에 유배 와 제주고씨를 아내로 맞아 정(禎), 복(福), 만(萬) 세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500여 년이 넘도록 강영의 묘를 찾을 수 없었으나 1929년 김달원 지관에 의해 묘를 찾았다고 한다.


그 후 강영의 39세손 강용범, 강정생이 1937년 방묘 앞 제절을 파헤쳐 지석을 발견하므로 강영의 묘임이 확인되었다.


지금의 강영 묘인 조천읍 조천리 119번지 내 방묘에서 기건(奇虔, 1443년 제주목사로 도임)이 쓴 묘지석이 발견되면서 강영의 묘소가 밝혀진 것이다.


지석은 가로9.2cm, 세로 18. 2cm, 두께 2.8cm 직사각형 모양으로 앞면에 ‘信川康永監司 壬寅隱跡於斯’뒷면에 ‘有 禎福萬 三子 有忠義 靑坡志’라고 쓰여 있었다.


강영의 무덤은 조천읍 일명 대봉림동산에 있다.


이곳의 풍수 형국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혹은 봉황이 둥지에서 알을 품은 봉소포란형(鳳巢抱卵形)으로, 묘의 좌향은 동북향이다.

 

1937년 지석이 발견될 때 무덤의 형태가 방묘였으나 후에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용묘가 되었다.


무덤의 문인석, 동자석, 상석은 조면암으로 만들어졌는데 1969년에 만들어진 석물들이다.


왼쪽으로는 강영의 아들 셋이 실묘(失墓)한 관계로 3기의 비석단을 만들어 기리고 있다.


신천강씨 후손들은 선조를 모시는 정성이 극진하여 강영의 묘역은 선조가 겪은 역사의 광풍을 치유하려는 듯 고요하고 포근하면서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