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남원 호화 방갈로 사건’ 터져 전국 이목이 제주로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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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환, 순원왕후 비난…추자도 유배
도지사 강신익, 국제공항 확장 추진
강어영, 제주부녀동맹 3·1 시위 활동
재벌과의 정경유착 ‘남원 방갈로 사건’
74동의 불법 건축물…각종 세금 포탈
▲ 세칭 ‘남원 호화 방갈로’ 사건과 관련해 1979년 3월 당시 제주신문은 검찰이 전면 수사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강시환姜時煥:1766(영조42)~?, 문신. 추자도에 온 유배인. 자는 성녀聖汝, 본관은 진주이며 강노의 아들로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1789년(정조13)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840년(헌종 6) 12월에 헌종이 직접 정사에 임하게 되자 풀려났다.


1836년(헌종2) 부사직에 있으면서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비난하고, 성학聖學의 권장 ‘勸聖學’, 빈민의 구제 ‘恤民隱’, 기강의 확립 ‘立紀綱’, 재용財用의 절약 ‘節制用’, 군정의 충실 ‘詰戎政’, 과거제 폐단의 혁파 ‘革科弊’등 6개 조목의 시정책을 상소하였다가 국정을 모독하였다는 죄로 추자도에 유배당하였다.

 

▲강신익姜信翼:1920(일제강점기)~2000, 행정가, 제19대 제주도지사. 본관은 진주. 경상북도 상주군 상주尙州읍 양촌梁村리에서 태어났다. 2000년 6월 4일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80세로 별세하였다.


1978년 9월 11일 장일훈張日勳지사의 후임, 제19대 제주도지사로 임명되었다. 2000년에 타계했다.


앞서 1936년 상주공립농잠農蠶학교 4년을 졸업, 조국 광복 후 1946년 1월 경상북도 지방기사技士로 출발, 1955년 3월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1월 제2회 고시考試 고등기술과 제17부에 합격, 1980년 1월 17일 강姜도백은 의원면직 형식으로 40여년의 공직생활을 마감, 그 후 지방행정공무원공제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60년 5월 기좌技佐로 특채되어 경북 농무과장과 산업국장, 기획조정관, 부지사로 고속 승진되었다.


1964년 10월 경기도 부지사, 부산시 부시장, 또 경북부지사, 충남 부지사, 또 부산 부시장으로, 1973년 산림청山林廳 차장과 지방행정연수원장을 거쳤다.


강도백은 도정道政 캐치프레이즈를 ‘아름답고 풍요로운 새 제주건설’로 정했다.

 

10년간에 걸쳐 일곱 차례나 부지사를 역임한 수완을 발휘하려고 하였다.


1978년 12월 12일 제주도선거구는 2명의 국회의원을 종다수從多數로 선출하게 되어 유정회維政會 소속이던 현오봉玄梧鳳이 공화당으로 출마 44,229표로, 또 무소속의 변정일邊精一이 41,805표를 얻어 동반 당선되었다.


나머지 양정규梁正圭(무소속) 40,534표, 부청하夫淸河(무소속) 26,841표, 오정보吳廷保(신민당) 16,294표, 고한준高漢俊(무소속) 15,013표를 각각 득표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2월 22일 ’유신維新‘2기를 이끌어갈 새 내각에 신현확申鉉碻을 전격 기용하면서 한편으로 제주 출신 고재일高在一 국세청장을 건설부장관으로, 또 제주도백을 지낸 구자춘具慈春 서울시장을 내무부장관으로 발탁해 강신익 지사에게 힘을 크게 실어준 셈이 되었다.


고재일 장관은 애월읍 광령리 출신으로 육사陸士 8기생이다.

 

대령으로 예편하여 5·16 뒤 청와대 비서관, 조달청·전매청·국세청장 등 재무부 직할청에서 건설부장관이란 막중한 자리로 옮겨졌다.

 

강姜 도백은 전임지사들이 남겨놓은 제주 국제공항 확장사업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民俗自然史博物館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모두 주민들과의 토지 보상문제가 걸려있어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강도백은 1978년 12월 18일에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이 기공식 첫날부터 반대 시위가 거세었다. 실은 박물관 부지를 처음 신산공원지구 내로 확정지은 것은 전임자 장일훈張日勳지사 때였다.


당시 제주도는 신산공원지구 일대 8만여 평에 박물관·휴게소·동식물원·민속촌 등을 마련 주민의 휴식공간과 외래 관광객에 보여주고 관광수입을 올려 보자는 계획이었다.


한편 강姜도백의 재임 중 전국을 놀라게 했던 희대의 사건은 남원면 남원리 소재 속칭 ‘황토개’ 해안에 건립된 세칭 ‘남원방갈로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관광개발을 내세운 행정당국과 재벌 간의 전형적인 정경政經유착사건으로 드러났다.


이 ‘황토개’ 일대에 조성되었던 호화방갈로 74동이 불법으로 알려진 것은 1979년 3월 하순이다.

 

이를 인지認知한 제주지검은 건축허가 경위들을 캐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절대농지에 건축물이 허가된 것이 밝혀지고 농가로 볼 수 없는 외지인 74명의 명의로 된 건축물이었다는 점이다.


건축허가는 전임 장일훈張日勳도지사가 재가裁可된 것으로서 실제 건축주는 모 호텔 대표 정모씨로 나타났다.


정씨는 아들  명의로 토지를 매입, 10여명의 명의로 분할하여 위장등기하고 취득세 등 각종 세금을 포탈한 것이 드러났다.


1979년 7월 하순 감사원의 조사결과를 넘겨받은 내무부는 제주도에 “방갈로에 들어선 문제의 농지를 원상복구하고 관계 공무원 10명을 징계하라.”고 지시했다.


또 동년 9월 14일 제주지검은 호텔 대표 정씨, 호텔 관리과장, 모 고교 교장(전 남원면장) 등을 구속했다.


아울러 호텔측이 9월 13일부터 철거에 들어가 11월 17일 폭파를 끝나 원상 복구했다.


이어 3월 10일 열린 재판에서 호텔 관리과장에게 징역 2년, 전 면장에게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들은 판결에 불복 항소抗訴했다.


제주지법 항소부에서는 호텔 관리과장에 대해서는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나머지는 각각 기각했다.


한편 강 도백은 1979년 10월 27일 새벽 2시께 내무부로부터 “도지사는 정위치에서 비상 대기하라.”는 긴급지시를 받고 즉각 김한욱金漢昱 비서관에게 등청하라고 했다.


얼마 후 야전복野戰服을 입은 제6해역사령관이 권총을 찬 채 지사실로 들려 비상이 걸린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강도백은 동이 틀 무렵 긴급 뉴스를 통해 박 대통령의 서거逝去를 알게 됐다.


도청 상황실에 분향소焚香所가 설치되고 모든 공무원에겐 일요일도 정상근무를 지시했다.

 

박대통령의 국장國葬은 11월 3일 거행되고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보궐선거가 통일주최국민회의에서 최규하崔圭夏대통령 권한대행이 단독 입후보, 당선되었다.

 

▲강어영康御榮(여):1910~1993, 본관 곡산谷山, 강진수康鎭洙의 딸로 제주시 삼도동 무근성에서 태어났다. 현철호玄喆昊의 부인.

 

해방공간에서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민전民戰을 주도한 현경호玄景昊의 제수弟嫂, ‘제주-성안’ 태생이다.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제주부녀회가 1947년 2월 21일 읍내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에서 대의원이 참석리에 부녀회를 제주부녀동맹으로 개편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1948년 4·3사건이 발생하고 동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선포식을 가진 후 제주 3·1시위사건에 관여된 인사들에 대한 강력 대응으로 나타났다.


동년 11월 도내 유지들을 제주농업중학교에 수용할 때 읍내 일부 여성들도 헌병대에 의해 구인되었다.


이때 강어영, 양청렬(문봉택文奉澤의 처), 김금순(김두훈金斗壎의 처) 등도 이곳으로 구인되어 수용되었다. 이후 제주여성동맹의 활동은 노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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