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내 아들을 대체 어디로 보내어 나의 간장을 끊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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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봉 이재수 母 송씨 방묘…安·仁·保 등 3리 마을서 건립
반란자라 칭해진 ‘제주 영웅’…누이는 진실 회복에 일생 바쳐
불량 천주교도에 맞선 반봉건·반외세 항쟁…재평가 돼야
▲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모슬봉에 있는 이재수 어머니 송씨의 무덤. 1940년에 세워진 이 비석에는 濟州英雄 李在守 母 宋氏墓(제주영웅 이재수 모 송씨묘)라 적혀있다.

▲제주영웅 이재수 어머니 송씨 무덤

옥녀탄금형국의 옥녀에 해당하는 모슬봉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그 어느 곳에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대하다.

 

한라산 서쪽에 해당하는 대정고을 남동쪽으로 박쥐가 금방 날개를 펼 것 같은 바굼지 오름(단산) 뒤로 문필봉이라 일컬어지는 산방산이 활짝 펴진 꽃잎처럼 서 있다.

 

산방산은 마치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장군의 위용으로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옛일을 회고케 한다. 역사를 잊는 사람이나 민족은 망하거나 복속되기 싶다. 자신이 지나온 일을 되새기지 않아 과거의 폐단을 따르는 잘못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인간사(人間事)가 약자(弱者)는 더 약자로써 취급받고 강자(强者)는 자기식대로 법을 집행하고 기록한다. 강자가 쓴 역사를 눈 여겨 봐야 하는 이유가 심각한 왜곡 때문이다.

 

한 국가가 멸망 위기에 처하면 관리들은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는 해가 마지막으로 반짝 빛을 발하듯 권력의 남용이 자행된다. 이는 현재에도 똑 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민정(民政)이 불안한 시기에는 온갖 명목의 부정이 일어나는 데 그 때마다 스스로 탐학(貪虐)을 해결하는 것이 민중이었다.

 

민중은 언제나 원인 제공자가 아니었고, 참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러야 태평(太平)의 요구를 외치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민중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짓 약속에 회유(懷柔)가 있을 뿐 법은 공평하게 집행되지 않았고 약자인 민중의 지도자만 희생되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가 보여주는 민낯이다.

 

모슬봉 기슭에 작지만 큰 무덤이 있다. 봉긋한 봉분이 어머니의 한 서린 울분을 토하듯 민의 소리로 뭉쳐져 있다.

 

비명(碑銘)은 앞면에 ‘濟州英雄 李在守 母 宋氏墓’ 이고 뒷면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昭和 十五年(1940년) 三月 日 安仁保 三里 一同’ 이라 쓰여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79cm, 넓이 29cm, 두께 11. 5cm로 산방산 조면암으로 만든 말각형 비석이다. 봉분의 크기는 가로 2.45m, 세로 3m, 높이 75cm 용묘이다.

 

산담은 없고, 일제에 의해 공동묘지가 조성되는 시기에 모슬봉에 묻혔다. 송씨 무덤의 좌향은 자신이 살던 동쪽 대정고을을 바라보며 오랜 회한의 세월을 지내왔다.

 

한 많은 작은 무덤, 이 땅의 어머니가 감내해야 할 모든 고통의 상징으로 외롭게 누워있는 이재수의 어머니 송씨.

 

계절은 그녀의 깊은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봄날을 기다려야 하는 겨울이 왔다.

 

장두 이재수의 누이 동생 이순옥 여사는 ‘이재수 실기’를 지어 오빠 이재수의 진실과 신원을 회복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이 글에 이재수 어머니 송씨의 원통한 절규가 들어있다. “유명무실한 제주목사의 비석은 곳곳마다 세워졌건만 어찌하여 도탄에 빠진 일반 백성의 원(怨)을 풀며 인정을 펴준 나의 아들의 비석은 없으며 이재수전이라 하여 내 아들의 행적 잡지는 사람마다 받아 읽는 말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어찌하여 내 귀밑에서는 읽어 알려주지 않느냐.

 

지금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나 죽어있나. 내 아들을 내가 죽어 하늘나라로 돌아가면 만나볼 수 있을까. 답답하다 이 세상 사람들. 나의 아들을 아무 죄도 없이 어디로 보내어 나의 간장을 끊는고.”

 

▲ 송씨 무덤 비석 뒷면에는 안성·보성·인성 3리 일동이라 적혀있다.

모슬봉 송씨의 무덤에 새겨진 제주영웅 이재수, 우리는 지금까지도 편안하게 그 이름을 불러보지 못했다.

 

민중을 위해 희생을 감내한 그를 우리는 역도(逆徒), 반란자라 칭한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아직도 가려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 곁에 그 이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비석으로 증명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비석이 이씨 집안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공동으로 건립했다는 것이다. ‘昭和 十五年(1940년)에 安仁保 三里, 즉 안성, 보성, 인성 3리 주민들이 세웠던 것이다.

 

1901년 신축 민중항쟁이 발발한 지 39년 후의 일이다. 또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어머니 송씨 무덤의 북쪽 방향으로 이재수의 형 이여관의 무덤이 있다.

 

이여관의 비석은 이름만을 빼고 비문이 모두 파괴돼 알아 볼 수 없게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다. 이를 감추려는 부끄러운 자의 소행이 아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으며 언제나 상상일 뿐, 이념의 덩어리를 존재자로 여길 수는 없다.

 

▲새롭게 재평가 돼야할 역사

김태능의 ‘제주도 약사(濟州島 略史)’에는 이재수 난(성교난)(李在守亂(聖敎亂))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주에 포교한지 일천(日淺)한 천주교도 중에는 불량 교도들이 일부 끼여 있어 프랑스 선교사가 치외법권이 있음을 기화(奇貨)로 그 권위를 악용하여 민간인들에게 각종 횡포를 자행하고, 또 봉세관의 남세(濫稅)에도 가담 협조해 민중을 괴롭혔다.

 

이에 광무(光武) 5년 3월말 경에 대정군(大靜郡) 출신 강우백(姜遇伯), 이재수(李在守) 등이 (장두 오대현은 이미 주성(州城, 제주성) 내에 감금 중) 삼읍 민중을 인솔하여 목사에게 오대현의 석방과 천주교도의 행패, 봉세관(封稅官)의 남세(濫稅)에 대해 진정(陳情)하려 주성 부근에 이르렀다가 천주교도들과 서로 충돌하였다.

 

민중 측에서 10여명이 죽고, 교도 측에서는 수백 명이 살해된 참담한 주성(州城) 전투가 있은 후 주장(主將) 이재수(李在守), 오대현(吳大鉉), 강우백(姜遇伯) 등은 다시 민군(民軍)을 이끌고 동서(東西)지방으로 나누어 나가면서 3읍 각지에 은거한 교도들을 색출하면서 참살하기 시작했다.

 

난이 계속되던 중 인천에서 도착한 정부 파견 진압군에 의해 난이 완전히 진압되었다.

 

파견군의 도착에 앞서 인천에서 불란서 군함이 자국인(自國人) 신부를 보호한다고 하여 제주에 왔고, 일본 군함은 불국(佛國) 군함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그를 미행해 왔었다.

 

장두 3인은 체포되어 한성(漢城)에서 사형에 처하였고, 불국공사(佛國公使)가 아국(我國)에 요구한 소위 민란시(民亂時) 교당(敎堂) 훼손 부담금이라는 돈 원리(元利) 합계 6315원(元)은 결국 3읍 인민(人民)이 공동부담하여 지불하였다.”

 

1901년 제주도 민중 항쟁을 진정시키려고 왔던 찰리사(察理使) 황기연(黃耆淵)이 작성한 ‘삼군교폐사실성책(三郡敎弊査實成冊)’에 나타난 천주교인들의 수탈과 만행을 보면, 토지 및 조세 수탈, 어장 수탈, 부채(負債) 묵인, 금전 탈취, 부당한 매매, 신당 파괴 등 토착 신앙 배격, 입교 강요, 간통, 산송(山訟), 개인 폭력(私刑) 등 실로 다양하다.

 

이와 같이 제주도에서의 천주교인들의 수탈과 만행은 부패한 권력의 행동가였던 봉세관의 비호와 치외법권의 특권이 있는 프랑스 신부를 의지해 자행된 것이었다.

 

이 기록만을 의존한다면 사건은 매우 한정되고 본질은 비켜간다.

 

과연 제주성이 함락되고, 수백 명의 인명을 앗아간 이 사건의 내용이 몇몇 불량한 천주교도와 봉세관의 세금 착취 때문만 있는 것일까.

 

조선의 중앙수탈제도가 국가위기를 맞아 더욱 타락하였고, 이미 인도차이나를 장악하고, 중국 대륙을 분할하여 조선까지 검은 손을 뻗은 제국주의의 야심이 있었다.

 

그래서 이재수의 항쟁은 조선의 조세 수탈제도를 바꾸고 종교를 앞세운 외세 개입에 반대한 반봉건 반외세 항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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