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동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 아줌마의 주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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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최근에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런 시기에 어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대한민국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미국 측의 허락을 받아냈다”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 주체성을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래전부터 우리의 입장은 그런 것이었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문제를 주체적으로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바로 그런 점에서, 성경에 나온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는 상당히 비슷하다.

이스라엘은 거의 언제나 강한 나라들 사이에서 어렵게 살아야 했다.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면 거의 그래왔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들을 향한 신의 뜻일 수도 있었다. 그 뜻을 따라 공평과 정의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세상의 요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신앙과 선택이 요청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주 강한 나라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멀리 보면서 공평과 정의를 향하면 당장은 어려움이 있어도 결국은 복된 길로 갈 것이고, 정치 경제적 현실주의를 따라간다면, 결국은 존중받기 어려운 나라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 정의에 근거한 주체성 없이는 개인이나 국가나 미래와 희망을 말하기가 어렵다.

약 3년쯤 전에, 미국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그와 관련된 상징적인 이름이 퍼거슨 시티이다. 미국의 퍼거슨 시티에서 흑인폭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당시 분노한 흑인 젊은이들이 전쟁터의 군인처럼 폭동의 흐름을 따라 몰려다녔고, 누구도 그들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년의 흑인 아줌마 한 사람이 폭동 대열에 달려들더니 한 청년의 멱살을 잡고서 폭동의 밖으로 이끌어 냈다. 그리고 아줌마는 그 청년을 사정없이 주먹으로 쥐어박고 발로 찼다.

무척이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폭동의 흐름을 방해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아줌마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폭동의 흐름은 아줌마와 청년을 못 본 척하면서 그들의 폭동을 계속 진행해 갔다고 한다. 그 아줌마는 그 청년의 어머니였다. 엄마가 자기 아들의 멱살을 잡고서 폭동의 흐름에서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 폭동에 대해서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찬반의 입장을 달리할 수도 있었을 듯하다. 그런데 엄마가 자기 아들을 폭동의 흐름에서 끄집어내려는 주체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엄청난 폭동의 흐름도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주체적인 마음을 판단하지 않았고 제재하지도 않았다.

폭동을 따르던 젊은이들이 “우리 엄마도 어디선가 나타나서 나의 멱살을 잡아끌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오히려 그 엄마와 그 아들로부터 멀리 피하려 하지는 않았을까 생각된다. 세계 최강인 미국의 공권력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는 그 폭동을 향해 주체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큰 경제력이나 강력한 무기나 넓은 땅으로부터 주체성이 나온다면, 그런 주체성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할 듯하다. 그런 류의 주체성은 진정한 것이 못 된다. 진정한 주체성은 누구나 수긍할 만한 보편적인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려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용기 있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폭동을 향해 아줌마가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감정적 한시적 주체성이 진정한 주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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