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굿판에서 누가 춤추고 노래 부르는가…억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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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따라비 오름
▲ 강부언 作 높은 하늘 따라비 억새 난장.

그리운 호곡장

ㅡ따라비오름

 

-서숙희

 

시퍼런 수평선 발끝에 걸치고서

뜨거운 불의 말을 가슴에 품은 그 섬

함묵의 등뻐로 엎드린 겨울 오름에 오르면

가파르게 옭아쥔 한 올 끈이 풀리고

부리지 못한 삶의 통증도 가벼이 하역되니

갇혔던 내 울음의 집이 바람처럼 헐린다

스스로 제 울음을 묻고 일어서는 통곡

싱싱한 슬픔의 뼈 하얗게 방목되는

그리운, 그 섬의 겨울오름 사무치는 호곡장

 

 

▲ 김영웅 연주자가 트럼펫 연주로 ‘you raise me up’과 ‘감수광’ 등을 선보이고 있다.

따라비오름에 오르면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이 눈먼 양딸과 함께 한없이 걸어갔을 것 같은 그런 길을 만나게 된다. 그 길은 걷고 싶은 길이 아니라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계절에 따라 아름다움이 달라지겠는가마는 따라비오름은 유독 가을을 타는 오름이다. 바람이 불어서가 아니다. 낮달이 비수를 품고 있어서가 아니다. 들꽃이 목숨 줄을 잡고 있어서가 아니다. 억새다. 마른 억새가 가을 한복판에서 강인한 생명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비오름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품을 내어 주지 않는다. 속울음을 풀어낼 줄 아는 이들에게만 비로소 일곱 개의 분화구를 열어 준다.

 

우리는 낮달이 시퍼런 눈을 뜨고 지켜보는 동안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섬잔대, 물매화, 쑥부쟁이, 꽃향유, 야고, 오이풀, 산부추 같은 처량한 들꽃들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난장이 시작되었다. 오늘 난장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경이로운 자연 앞에 정중히 고할 뿐이었다. 하늘은 오직 억새만이 난장을 벌일 수 있도록 허락한 듯했다.

 

김영웅 트럼펫 연주자가 ‘you raise me up’을 몇 음절 연주하자 하르륵 악보가 날아가 버렸다. 연주자는 악보 없이 연주를 마치고 크게 한번 웃었다. 그리고는 한결 가벼운 느낌의 ‘감수광’을 이어서 연주했고 우리는 우리의 소리가 바람에 묻혀 들리지 않음에도 노래를 불렀다. 김영웅 연주자의 마지막 연주곡은 영화 ’지상에서 영원하라‘의 삽입곡인 ’밤하늘의 트럼펫‘이었다. 전쟁터에서 전사한 전우의 혼을 달래주는 곡이다.

 

▲ 김정희 시낭송가가 서숙희 시인의 시 ‘그리운 호곡장’을 낭독하고 있다.

이어서 서숙희 시인의 ‘그리운 호곡장’과 문순자 시인의 ‘파랑주의보.10’을 김정희 시낭송가와 손희정 시낭송가가 각각 낭독하였다. 호곡장은 연암 박지원이 요동땅을 처음 밟았을 때 ‘이 너른 벌판에서 사람이 울기에 딱 좋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가 된 말이다. 문순자 시인의 시 ‘파랑주의보.10’의 내용 중 ‘별들 떠난 흔적인가, 일곱 개 저 분화구 산지천 은어 떼 오듯 별이 뜰 수 있을까’에서처럼 따라비오름엔 3개의 원형 분화구와 4개의 말굽형 분화구가 있다. 마치 북두칠성을 연상케 하듯.

 

난장의 마지막은 강순복 작가의 구성진 타령으로 마무리되었다. 마디마디 구불구불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가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억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제주 368개의 오름 중에서 그 능선이 가장 아름답다는 따라비오름에서 시인은, 화가는, 연주자는, 낭송가는 들꽃처럼 낮아지고 있었다.

 

글=손희정

그림=강부언

노래=강순복

트럼펫 연주=김영웅

시낭독=김정희, 손희정

사진=문순자

 

※다음 바람난장은 11월 18일 오전 11시 박흥일 서예가 집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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