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서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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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 / 수필가

가을바람이 손짓하는 책 축제에 나들이 간다.


따스한 11월의 햇살을 어깨에 얹고 ‘책으로 가득한 섬. 제주’를 주제로 펼치는 제주독서문화대전, 탑동해변공연장 일대가 들썩인다. 책으로 쌓은 조형물과 설치미술로 축제장을 장식한 가운데 도내 도서관과 서점들의 전시부스가 축제의 분위기를 띄운다. 명사들의 초청강연과 공연, 책 전시와 북 마켓, 체험코너에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속삭임으로 가을이 익어간다. 국화처럼 향기롭다. 이동도서관인 북버스에는 손주와 같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마치 책의 요정을 보는 듯하여 미소가 번지면서 소싯적 생각이 피어오른다.


지금처럼 책이 흔치 않던 시절이기에 읽을거리가 별반 없었고 어쩌다 읽을 책을 구하게 되면 그 자체가 하나의 성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책 주인이 먼저 읽고 나면 동네 아이들이 차례로 돌려 읽던 시절이었다. ‘왕자와 거지’, ‘로빈훗의 모험’ 등이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그때부터 책에 흥미를 느낀 당초가 되었지 싶다.


어느 때인가는 딱지치기에서 몽땅 털린 나는 그냥 구경만 할 수 없어 집으로 돌아와 딱지를 만들 묵힌 책들을 뒤적거렸다. 안방 벽장 위에 묶여 있는 책 꾸러미에 눈길이 갔다. 종이가 어찌나 반질반질한지 딱지가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잘 뒤집어지지 않을 것 같은 욕심에  책장을 찢어 딱지를 만들었다. 예상이 적중했는지 새로 만든 딱지는 거북처럼 땅바닥에 붙어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잃었던 딱지를 되찾고도 여분이 많이 남았다. 부자가 된 나는 저물녘이 되어서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형에게 자랑스럽게 비결을 얘기했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화첩을 꺼내들고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옆에 계시던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서는 뭐라 버럭 말하려다가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천장에 길게 연기를 뿜으셨다. 아버지가 화를 꾹 참는다는 것을 낌새로 느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것은 우리 가족이 일본에서 해방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올 때 아버지가 소중히 여겼던 분재그림책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책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고 심지어 밑줄 긋는 것조차 책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기곤 했다.


북 마켓에서 손주들이 읽을 그림동화책과 눈에 꽂힌 몇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가을에 만나는 좋은 친구와 같은 생각이 들자 문득 우리 집 서재 벽면에 걸린 액자 글귀가 아른거렸다. 如逢故人(여봉고인), ‘책을 읽고 나면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이 기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명구는 명나라 때의 문사 진계유의 독서십육관에 나오는 한 토막이다. 스산한 가을에 옛 벗을 만나는 반가움이 연상된다. 가을 달빛이 마당을 요요히 채워주는 밤에 책을 보는 즐거움은 그리운 님을 만나는 떨림과 같은 그 무엇이리라.


조선시대 책을 좋아했던 두 임금이 생각난다.


문신들에게 책을 읽도록 하는 유급휴가인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시행했던 세종, 즉위하자마자 제일먼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웠던 정조. 그러기에 그 시대에 찬란한 문화가 융숭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선비로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했던 이덕무(1741~1793)가 떠오른다. 항상 작은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어디서든 꺼내 읽었던 책벌레. 평생 동안 읽은 책이 2만권이 넘었고, 읽은 책을 베낀 것 또한 수백 권에 달한다. 글씨가 반듯하고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를 쓴 것은 한 글자도 없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미처 읽지 못한 책을 만나면 기뻐서 히죽 웃으니 사람들은 그를 간서치(看書痴)라 불렀다. ‘책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그의 왕성한 독서력과 다양한 지식은 정조시대의 학문과 문화 수준을 더욱 높여 놓은 인물이었다.


나도 이 가을이 끝나기 전에 잡다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사가독서를 한번 시도해 볼까. 그래서 이덕무처럼 ‘간서치’라는 별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가을이 주는 최고의 선물일 터인데….
하늘이 참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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