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계 단상(秋季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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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호 수필가

세월 유수(流水)라더니, 어느새 찬바람이 분다. 쉴 새 없이 땀을 흐르게 하던 볕이 도리어 그리워진다. 홍록으로 물드는 가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센티멘털리스트(sentimentalist)가 되지 않기 위해 과감히 일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포장이야 그럴 듯하지만, 기실 40년 지기 벗들과의 부부 동반 여행이다. 이번에는 외화도 아낄 겸 남도 답사 길에 나서기로 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여러 모로 훌륭한 선택이었다.

 

늘 가슴 넓은 태평양을 코앞에 두고 살아온지라 바다가 뭐 그리 새로울 리 없건만, 마치 호수처럼 잔잔한 다도해의 물결은 색다른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모처럼 여유로운 마음 탓도 있겠지만, 눈길 닿는 풍경들 어느 하나 멋들어지지 않은 게 없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던가, ‘보는 것만큼 안다’는 말이 그른 말이 아님을 알겠다.

 

벗들과의 정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다. 간단한 조식 후 찾은 순천만 연안 습지. 세계 5대 연안 습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척 광활하다. 160여만 평의 갈대밭과 630여 만 평의 갯벌은 그저 광야 한가운데 서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관광이라 하면 으레 명승 고찰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게 다반사일진대, 필자에게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싶다.

 

어찌 보면 그저 평범한 갯벌이요 습지에 불과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탐방로와 관리동 등 필수 불가결한 요소를 제외하고는 일체 사람의 손길을 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근의 국가정원이 인위적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곳이라면, 여기는 꾸밈이 없는 ‘자연’이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를 보듬어 안고 있는 갯벌에 숭숭 뚫린 구멍마다엔 농게, 칠게, 장뚱어 들이 서식하고, 물가에선 이름 모를 철새들이 부지런히 먹이를 찾고 있다.

 

예서는 탐방객들 또한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모처럼 아내와 팔짱을 끼고 전혀 바쁠 게 없는 걸음을 옮기는 우리 또한 그러리라. 문득 사진을 찍는 아내의 손등에 왕잠자리 한 마리가 살포시 날아와 앉는다. 녀석은 사람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모습인데, 놀란 아내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소곤거린다. “왕잠자리∼!” 이내 메아리 되어 자꾸만 내 귓가에 맴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제주는 참으로 환상적이다. 그래. 그러고 보면 천혜의 비경을 늘 지척에 두고 살아가는 우리 제주인은 축복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그 안에 머무르는 동안 온전히 보존하려는 혜안이 필요하리라.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자연은 ‘자연(自然)’ 그대로 놔두는 게 상책일 게다. 저녁놀 드리워진 내 고향의 가을이 홍시처럼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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