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갑자사화 피바람 피해 제주로…후손들 문무 겸비해 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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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입도조 강철 묘-“나의 원통함을 알려주오”…생모 유언에 연산군 복수극
강철, 6촌형 집안 4부자 참화…김종직 문하 모두 희생돼
▲ 제주시 오라동에 위치한 진주강씨 입도조 강철의 묘역. 쌍묘의 형태로, 일제강점기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돌담을 두르고 틈 사이에 시멘트를 발랐다.

▲연산군의 갑자사화


섬 밖에서 보면 제주는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섬 안에서 보면 제주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정치라는 것이 백성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라면, 과거나 지금이나 권력의 언저리에는 항상 바람이 세게 분다.


과거에 절개란 임금을 바꾸지 않는 것을 말한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곧 군신유의(君臣有義)의 깊은 뜻이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는 많은 신하들을 해하였다. 그 중 유독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등 몇 사람만이 절신(節臣)으로 전해진다.

 

우암은 연산군에게 고문을 당하고 귀양 갔다가 다시 잡혀가는 길에 한 역참에 이르자 자신의 다가올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만장과 묘갈명을 짓고 도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길에 중종이 즉위하고 중종은 연산군 때 내쫓긴 신하들을 먼저 복권시켰으나 우암만은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유유히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즐거이 지내다가 일찍 죽었다.

 

“바다 섬 속에 귀양 가 있으면서 정신이 괴로운 중에 문묵(文墨) 아니면 즐거워 할 일이 없으나, 학문의 공(功)은 큰 것이다. 진실로 내게 마음으로는 착한 것과 악한 것을 가려내고, 입으로는 옳고 그른 것을 말하게 하여, 남의 시기와 미워함이 내 한 몸에 모여서 화를 당하게 한 것도 학문이지만, 스스로 그만큼 학문의 힘으로 얻은 것도 위와 같다.”


갑자사화는 연산군 10년(1504)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복위(復位) 문제로 연산군이 일으킨 사화로 조선의 4대 사화로 일컬어진다.

 

성종비(成宗妃)였던 윤씨는 투기(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통을 지키지 못한다고 하여 성종 10년(1479)에 폐위시키고 이듬 해 사약을 내렸다.


연산군이 왕이 된 후 어머니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는 갑자년에 성종 때 길러낸 수많은 선비들을 해 한 사건이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을 적에 자신의 어머니인 신씨에게 피 묻은 수건을 건네며 유언으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으로써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오” 라는 데서 시작된 사화다.


▲강철의 입도 동기


진주 강씨 제주 입도조 강철(姜哲)도 갑자사화와 무관하지가 않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강철의 재종형(再從兄:6촌형) 집안은 4부자(父子) 모두 참화를 당했다.

 

강철의 백부(伯父) 강자평(姜子平)은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고 문기(文氣)가 뛰어나 두 번이나 승지가 되었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슬하에 세 아들 형(詗), 겸(謙), 흔(訢)을 두었다. 자평의 아우 자순(子順)은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반성위(班城尉)가 되었다. 강형(姜詗)은 자평의 큰 아들로 자는 형지이며 성종 경술년(1490년)에 문과에 올라 대사간이 되었다.


강겸(姜謙)은 자평의 둘째 아들이며 자는 겸지(謙之), 성종 경자년 문과에 올라 예조 좌랑(禮曹佐郞)에서 직강(直講)이 되었고, 무오년에 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화를 당했다.

 

중종 초년에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강흔(姜訢)의 자는 시가(時可)로 강자평(姜子平)의 막내아들이다.

 

홍유손, 김종직 등을 사사하였다. 처음에는 밀양(密陽)에서 홍유손(洪裕孫)에게 배웠고, 점필재(佔畢齋)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웠다.

 

강철의 제주입도 동기를 보면, 전라관찰사로 가 있던 백부 강자평을 따라 간 강철은 아버지 강회(姜檜)의 묘지가 있는 전주 완산으로 잠시 피신하여 잠시 은거하다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문하가 모두 희생되는 소식을 접하자 연산군 12년, 중종 원년(1502)에 급기야 제주에 입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주에서 일으킨 집안


강철은 제주도 입도조가 되어 부인 경주 이씨를 맞아 슬하에 철동(鐵銅), 송동(松銅)을 두 아들을 두었다.


강철동(姜鐵銅)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왜구 격퇴에 공을 남겼고, 강송동(姜松銅)은 학문에 힘써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장손(長孫) 강우회(姜禹會)는 대를 이어 무관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돼 수산리에 정착하여 애월진 방어사로 임진왜란 전후로 왜구를 격퇴했다.


중종 중엽 훈련원 참군(訓練院 參軍)을 지낸 강회의 아들로 한양에서 출생했다. 강철의 시조는 고구려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으로 시작되고 고조(高祖)는 고려 우왕 때 대제학을 지낸 강회중(姜淮仲) 공이다.

 

재종형 대사간 강형(姜?)까지  가계를 봐도 강철의 집안은 문무를 겸비하고 곧은 소리를 잘하는 명문가임을 알 수 있다.

 

▲ 강철의 묘역 근처에 있는 옛 비석.

강철의 묘지는 쌍묘로 오라동에 있다.


옛 이름은 월구동(月龜洞) 지역인데 묘지 양식이 고려시대 전승된 방묘이다.

 

사방을 현무암 호석으로 둘렀는데 일제강점기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돌담을 두르고 틈 사이에 시멘트를 발랐다.

 

묘역에 구비를 보니 작은 비석은 소화 19년이니 1944년에 세운 것이고, 큰 비석을 보니 단기 4296년이어서 1963년에 세운 것이다.


호석은 시멘트 색이 검어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일제 말엽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큰 비석의 지명을 보니 ‘濟州市 西門外 道嶺旨 雙墳 午坐之原’이라고 하여 일제강점기에 마을 이름이 월구동(月龜洞) 이고, 1960년대에는 도령마루(道嶺旨)라고 표기하고 있다.


강철의 무덤은 예전에 실묘(失墓)되었었다.


진주 강씨 집안에서 발행한 ‘水姜事蹟’ 에 보면, 진주강씨 집안에서 1890년 대에 입도조 묘소를 찾기 위해 족보에 기재된 대로 도령마루 일대를 뒤졌고, 거기에서 고총을 발견했다고 한다.


수소문 끝에 그 지역 촌노에게서 그 무덤이 강가 무덤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당시에는 모두들 부정적인 입장이어서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중당이굴과 먹돌세기를 탐문하고 다니던 끝에 다시 강가 무덤이라는 말을 듣고는 급기야 1907년도에 도령마루에서 입도 1세인 진용교위공, 별라화 입도 2세 어모장군공 2개소 선영을 찾게 되었고 오늘에 이른다.


강철의 묘역은 산담을 후에 쌓았다. 원래 방묘에는 판석이나 할석으로 무덤 보호용 호석을 두른다.


하지만 강철 부부의 방묘에는 흙 봉분이었으나 후에 돌담 호석을 두른 것이다.


묘역 뒤편으로 강철의 아버지 강회(姜檜)를 기리는 후손들이 1986년에 추모단을 세웠다.

 

강철이 갑자사화로 급히 피신하여 입도하는 바람에 아버지 무덤을 지킬 수가 없었고, 그 후로도 선묘를 찾을 길 없어 그의 후손들이 정성을 들여 강회(姜檜)를 기리는 비라도 세운 것이다.


제주도 문화는 입도조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어쩌면 원주민인 고, 량, 부 3성을 빼고 나면 제주의 문화는 그야말로 외부에서 이입된 문화의 혼합적 성격이 많다.

 

특히나 60만의 인구 중 다른 지역보다도 절개가 높고, 야성이 강하며,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도 입도조 연구를 통해서 규명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지역사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변화되는 바가 많다.

 

그것은 섬이라는 특수성, 즉 피신처이자 때로는 감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양면의 모습을 안고 있는 것이 제주 섬의 영원한 운명이라면, 오늘날 세계화라는 현상 또한 침략에 대비하는 방어 기제로써 로컬리티로 길러진 주체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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