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진숙 作 서예가의 붓과 레코드 판.

민들레 홀씨 날려 넉넉해진 섬이 있다.

시인묵객이 다 우려내 비밀 한 점 없지만 한여름 별빛을 품어 말갛게 깨어 있다.

 

누가 마라도에서 키를 재려는가

잔디는 땅을 기어 머리 들지 않으며 찔레는 습성대로 낮게낮게 발을 딛네

늙은 해녀들이 처녀당에 불을 켜듯 질긴 목숨 순비기가 바람꽃을 토해낸다.

억새는 고집스레 묵은 꽃대 세우고

해풍에 마음 푸는 얼굴 환한 소나무 고개를 들 때마다 삭정이가 부서진다

그래도 누군가 욕심을 부리나 보다 주뼛주뼛 빗돌들이 바람을 거스르네

등대여, 그대 밤불을 놓아 저녁 바다 후끈한가

 

이제 내방객은 가만히 고수가 되라

둥그런 수평선의 큰 북 같은 노을 앞에, 무시로 섬을 때려라

아, 마라도 쇠북소리

 

-홍성운의 ‘마라도 쇠북소리’ 전문

 

신제주 어느 주택가. 시골 점방 같은 우편취급소. 그 뒷골목에 빌라 몇 채가 있고, ‘자선(自禪)’이란 간판이 있는 집, 그 지하에 40여 평의 널찍한 서예 창작실이 있다.

 

마흔여섯 번째 바람난장은 그곳을 찾았다. 서예가 박흥일 씨(한국서예협회 제주지회장) 창작실이다. 번역가 김석희 선생이 가을 끝물 추위엔 실내가 좋을 것이라며 굳이 추천한 장소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날은 올가을 가장 추운 날씨라 ‘실내 난장’의 선택은 신의 한수(?)였다.

 

   
▲ 기타동아리 ‘끌림소리’가 ‘그대 없인 못살아’, ‘찔레꽃’ 등을 선보이고 있다.

홍성운 시인의 ‘마라도 쇠북소리’를 낭송하는 것으로 난장의 문을 열었다.

 

김정희 시낭송가가 이 작품을 낭송하는 내내 내 귀엔 어느 선배가 곧잘 불렀던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는 노래가 그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것이었다. 아마 ‘쇠북소리’라는 공통의 이미지 때문일 테다. 시인은 내방객들에게 북채를 쥐여준다. 그리고 ‘둥그런 수평선의 큰 북 같은 노을 앞에, 무시로 섬을 때’리라고 외친다. 마라도 쇠북이 우는 그 순간, 섬도 작고 시인도 작고 시만 홀로 크다.

 

그 여운을 손희정 시낭송가가 이었다. 나기철 시인의 ‘수선화’다. 사실 이 작품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우리 마음의 동네에서/언제나/ 일정한 무게를 가지고 흔들거리는/ 아름다운 무늬가 있으니/ 그것이 꽃을 사랑하는 마음/ 누이의 가녀린 손이 꽂아준/ 수선화의 그윽한 음악 속에서/ 오늘은 그런 화사한 꽃 이야기를/ 나누자’로 시작되는 이 장시는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쓴 것이다. 수선화의 시듦과 누이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시인의 태생적 외로움이 빚어낸 절창이다.

 

오늘 음악은 기타연주다. 8년 전, 제주시 평생학습관 출신 30여 명으로 기타동아리를 만들었고, 그 이름을 ‘끌림소리’라고 했다. 이들에게 ‘공짜’란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무료로 기타를 배웠으니 그것을 사회에 돌려주자는 취지에 모두가 한마음이 된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요양원이나 장애인 시설 등을 돌아다니며 재능기부를 하는 일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한다. 이날은 진창희 회장을 비롯해 오수종 고광범 정혜승 부경희 탁선옥 임은정 부금애씨 등 여덟 분이 참석했다. ‘그대 없이는 못살아’, ‘바램’, ‘꿈의 대화’, ‘찔레꽃’, ‘멋진 인생’ 등 자동 앵콜(?)로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손뼉을 치며 흥겹게 합창을 했다.

 

   
▲ 35년째 붓을 잡고 있는 박흥일 선생의 현장휘호 모습.

묵향이 그윽한 서실에 왔으니, 현장휘호가 없을 수 있겠는가. 35년째 붓을 잡고 있다는 박흥일 선생이 단숨에 ‘曲則全(곡즉전)’이라고 써내려 갔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굽은 게 곧 온전하다’ 함은 혼잡한 이 시대를 환기하는 것이겠다. 그는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작품을 누구에게도 공짜로 준 적이 없다”고. 이런 그에게서 진정한 프로의식을 가진 작가정신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오니 난장의 열기 탓인지 추위가 한풀 꺾여 있었다.

 

글=오승철

그림=홍진숙

노래=기타동아리 ‘끌림소리’

시낭송=김정희·손희정

사진=허영숙

서예=박흥일

 

※다음 바람난장은 11월 25일 오전 11시 모슬포 알뜨르비행장(비엔날레 전시 공간)에서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