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재앙과 횡화는 적선하는 집에 어른거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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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 삼의사비-강용권, 일본대 법학부 졸업해 제주검찰청 검사장 등 역임
명필 강용범, 간재 전우의 제자 동생 강구범, 기당미술관 설립
강용옥, 국회의원 강경옥 아우…우에무라제약 부사장 등 역임

▲강용권康用權:1908(융희2)~?. 경성법학전문 졸업. 변호사.


제11대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성산면 오조리<오졸-개> 태생,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1941년 변호사 개업, 정부수립 후 1949년 대구고검 검사로 출발하였다.


부산지검 차장검사로 1952년 대구고검 차장검사를 거쳐 춘천지검 검사장, 청주지검 검사장, 전주지검 검사장을 거쳐 1960년 5월 27일 제주지방검찰청 제11대 검사장으로 부임하여 1개월 후인 동년 6월 30일 그만두었다.


1960년 당시 제주지검의 직원 정원은 검사 4명, 서기관 3명, 서기 5명, 서기보 1명 등 모두 14명이었다. 이어 전주에서 이어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였다.


▲강용범康用範:1909(융희3)~?, 본관은 신천, 서예가, 간재艮齋 전우全愚의 문하생, 호는 소석小石 혹은 수암修庵,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강거석康巨石과 어머니 김양보金良寶의 4남으로 부자 집에서 태어나 글씨 쓰기에 열중했다.


1920년 아우 강구범과 함께 대학자 간재 전우田愚의 문하생이 되어 전라북도 계화도界化島에서 한문을 배웠다. 앞서 스승이 이승을 뜨자 그만 두었다. 한말부터 명필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의 아우 강구범康龜範은 재력을 이룬 재일교포로서 서귀포시에 기당奇堂미술관을 지어 기증, 이 미술관에는 ‘도인수리刀刃雖利’ 등 수암의 서예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강용범康用範의 글씨 도인수리刀刃雖利, 수량:1점/ 규격:34㎝×103.5㎝/ 연대:근대/ 소유자:기당미술관(서귀포시 문예회관)/ 재질:화선지. 강용범康用範의 필적이다. 호를 소석小石, 수암修庵이라 하였고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출생하여 조천에서 살았다.


한말에서 왜정까지 살아 명필이라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이 기당奇堂 미술관에 전시실을 마련하여 많은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나 거의 같은 때에 쓴 것들이어서 필법을 논하기 어렵다.
본 필적도 수암의 대표작이라 할 수는 없겠다. 글의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칼날은 날카로우나 죄 없는 사람을 찌르지 못하고 재앙災殃과 횡화橫禍는 적선하는 집에는 하지 않는다’

 

▲ 강용범의 휘호. <기당미술관>


▲강용옥康龍玉:1918(일제강점기)~1993, 사업가. 행정관리. 변호사. 본관 신천.


서귀포시 법환리<법-하니>에서 강형은康亨殷의 아들로 태어났다.


국회의원 강경옥康慶玉과 법제실장 강명옥康明玉의 아우이다.


1943년 동경東京제국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하면서 일본 고등문관 시험에 응시하여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1970년 수출잡화시험검사소 이사장, 1973년 완구玩具수출진흥회 회장 등을 거쳐 1977년 이후 변호사 업에 종사하였다.


앞서 광복 후 1946년 우에무라<植村>제약주식회사 부사장, 이듬해 국민대학과 서울법대 강사를 역임하고 변호사 업무를 등록하였다.


1948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工政과장, 심계원 제2국장, 상공부 무역국장 등 공직을 역임하였다.


▲강우문姜遇文:생몰년 미상, 문신. 제주분대어사分臺御史. 본관은 동복, 1438년(세종20) 식년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관직은 전적에 이르렀다.


1464년(세조10) 11월 겸사헌집의執義 강우문을 제주의 호패분대號牌分臺로 임명하여 제주에 보냈다.

 

이 해에 강우문은 제주목사 복승리卜承利가 요사스러운 제사를 거행하고 있음을 조정에 급보하였다.

 

필자가 살피건대 이 천외당이라 함은 현재 제주사대 부속고등학교 구내 동쪽 모퉁이에 있는 내앗당<川外堂>이며 한내 밖에 있는 사당이란 뜻이다.

 

앞서 1466년 4월 복승리는 서울로 압송되어 승정원承政院에서 국문을 받아 억울함을 호소하니 무고임을 알아냈다.


같은 해 7월에 사람을 제주로 보내어 집의執義 강우문을 서울로 호송해 와서 의금부에서 조사한 결과 강우문이 목사 복승리를 모해하고자 노산군魯山君(단종의 降號)의 얼굴을 그려서 그 화상에 제사를 지냈다고 무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강우문의 보고에 의하면 1463년 9월 현재 제주 삼읍의 호패 분급자 총수는 1만6470명임이 확인되었다. 호패란 16세 이상의 남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표찰이다.


승정원에서는 새로운 제주목사 이유의李由義에게 지시하길 “앞서 강우문의 천외당신川外堂神(내앗당) 화상畵像은 이미 소각하였음을 알렸는데 이제 강우문이 말을 바꾸어 사단이 생긴 사정을 알아서 이미 치죄하였으니 그 당신에 예전대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강우문은 죄인이 되고 1466년(세조12) 7월 의금부에서 장杖 100대에 유流 3000리라는 유배형이 내려졌으며 천외당신에 대한 제사는 그대로 시행된 것이다.


※(필자의 변): 필자가 제주대학 사대부고 교장 재임시에 체육장 동쪽에 내앗당이 있어 ‘다끄내’ 마을의 어부나 해녀들의 안전을 비는 당으로 이용하고 있었다.이 당에는 아마 선조 당시에 화상은 소각당하고 그 후 새로운 화상을 그려 모시어 당신제堂神祭를 계속 거행하였다. 지금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는 무신도誣神圖는 바로 새로운 화상인 것으로 유추된다. 이 무신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감정이 요청된다.

 

▲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홍살문 거리에 세워진 삼의사三義士(이재수·오대현·강우백)의 비석.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우백姜遇伯:1852(철종1)~1901(광무5), 상무사 회원. 제주 신축민란의 주동자. 일명 강오백姜五百. 본관은 진주, 대정군大靜郡 중문리<중-물>에서 강시양姜時陽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뒤에 제주면 월평리<도랏쿳>로 옮겨 살았다.


1901년 6월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봉세관 강봉헌姜鳳憲, 증인 채구석蔡龜錫 등이 순검巡檢과 찰리사察理使 등에 잡혀 이끌려 창룡호蒼龍號 편으로 인천을 거쳐 7월 18일 서울로 들어가 법부의 감옥에 갇혔다.


앞서 1898년(광무2)에 발생한 방성칠房星七란에 함께 참여, 이듬해 천주교 예비 신자로서 성당을 드나들었으나 나중에 신앙생활을 단절하고 오히려 반천주교 운동에 앞장섰다.


대정 사설 상무사商武社(사장 채구석)의 회원이면서 월평리의 이강里綱으로서 제1차 봉기시 동진장두東陣狀頭로, 제2차 봉기시는 동진장東陣將으로 민군을 지휘하였다.


1901년 일부 천주교도 및 봉세관捧稅官의 작폐가 심하자 상무사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세폐를 구할 목적으로 같은 해 4월 9일 월평리 이민을 이끌고 대정군수에 호소하는 등 끊임없이 농민운동을 지도하였다. 


1901년 10월 9일 교수형이 집행되어 서울 청파동靑坡洞 묘지에 묻혔다.


※‘增補耽羅誌’, ‘耽羅紀年’, ‘제주도신축년교난사’(김옥희), ‘續陰晴史’(김윤식), ‘한국천주교회사’(유홍렬), ‘제주도사연구’(1991), ‘제주도연구’(제8집), ‘20세기제주인명사전’(김찬흡/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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