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혼을 실은 한 획으로 난죽의 정신과 기운 담아내는 거장
(27)혼을 실은 한 획으로 난죽의 정신과 기운 담아내는 거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공직 접고 난과 30년…당대 최고의 대가 제자로 입문
부단한 노력 끝에 ‘큰산’으로 우뚝…중국인들도 극찬
“출향인 모두 마음을 모아 제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
▲ 강법선 화백이 지난 22일 작업실에서 대나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

“난전(蘭田) 강법선 화백(65)은 일찍이 일주(一洲), 옥봉(玉峰)으로 이어지는 사군자화(四君子畵)에 서린 애국정신을 정통으로 계승하여 그림은 이미 도(道)에 이르렀고, 선학(禪學)을 연구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뜻깊은 학자이기도 하다.”

 

강 화백이 지난 9월 개최한 난죽전의 홍보책자에 실려 있는 류건집 서산포럼 지도교수(전 원광디지털대 석좌교수)의 글 중 일부다.

 

강 화백이 어떤 인물인지 가장 함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글인 것 같다.

 

▲부모님 영향으로 난과 서예를 접하다

 

강법선 화백은 제주시 삼양동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 화백의 부친은 경찰 공무원을 하다가 농협조합장을 지낸 강준성씨고, 모친은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김정열씨다.

 

그는 부모님 영향으로 ‘난과 생활’ 잡지를 발행했고 난죽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집에 계실 때 항상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어머니로 인해 서예를 알게 됐고, 아버지로부터 결혼 선물로 한란을 받은 후 난에 빠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삼양초와 오현중·고를 다닌 그는 제주대학교 수산학과를 졸업한 후 1976년 수산직 공무원으로 수산진흥원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강 화백은 1986년 ‘난과 생활’을 발행하던 잡지사가 부도를 맞게 되자 이 회사를 인수한다. 공직 생활까지 접고 본격적으로 잡지 발행에 나선 그는 올해로 31년째 ‘난과 생활’을 발간해 오고 있다.

 

▲어떻게 난죽화의 거장, 옥봉 스님의 제자가 됐나

 

강 화백이 옥봉 스님의 제자가 된 것은 ‘난과 생활’ 잡지를 발행하면서 한국 서예계의 큰 산이었던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을 취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일중 선생에게 왜 사군자는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라는 답변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옥봉 스님이 사군자를 가장 그린다’”는 말을 듣고 공주 동학사로 옥봉 스님을 찾아간 것이다.

 

가르침을 받겠다는 간절한 마음과 정성이 통했다.

 

그는 35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당시 75세였던 옥봉 스님 문하에 입문하게 된다.

 

“사군자를 그릴 때 가장 먼저 난초부터 배우는데 스승님으로부터 맨 처음 가르침을 받을 때는 난초 잎과 대나무 잎만 계속 반복해서 그렸다”는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스승의 화법을 배워 나갔다.

 

강 화백의 난죽화는 하루아침에 배운 게 아니라 수천 번, 수만 번의 연습 끝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강 화백은 “난초를 그릴 때는 핵심은 꽃이 아니라 잎이고, 대나무 역시 줄기보다 잎이 그리기 어렵다”고 밝히고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정신과 기운을 한 획으로 이파리에 담아 낼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며 스승으로부터 배운 화법을 소개했다.

 

▲ 지난 9월 27일 서울 백악미술관에서 열린 강법선 화백 난죽전 전시회 개막 모습,

▲난전, 난죽화의 대가로 인정받다

 

강 화백이 난죽화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93년 6월 추사 김정희 선생 추모 서예백일장 휘호대회에서 사군자부문 최고상을 받으면서다.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때다.

 

그 후 강 화백은 일주 선생과 옥봉 스님으로 이어지는 사문적전(斯文嫡傳)의 화법을 정통으로 계승한 작품들을 각종 전시회 등에 출품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53세가 되던 2005년 12월 백악미술관에서 제1회 난전화백 난죽전을 개최했고, 2008년 10~11월에 제2회 난죽전, 그리고 올 9월에 세 번째 난죽전을 열었다.

 

전남 함평군 자연생태공원 개관 기념 초대 개인전 등 국내 전시회도 가졌다.

 

강 화백은 특히 중국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07년 3월 중국 저장성 닝보시에서 인민정부 초대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1년 중국 충칭시에서 아세아태평양 난화박람회 초대 개인전 등 9회에 걸쳐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중국인들이 제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져준다”며 “같은 난죽화인데 제 작품이 특별하다는 평가를 해준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서 대나무 그림을 같이 그려보자는 많은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일주 선생과 옥봉 스님으로 이어지는 사문의 화법을 지키지 위함이다.

 

▲‘난과 생활’, ‘월간 다도’를 소개한다면

 

강 화백은 1986년부터 31년 동안 ‘난과 생활’, 그리고 1999년부터 18년간 ‘월간 다도’를 발행해 오고 있다.

 

“‘난과 생활’은 난의 정신과 재배 방법, 보는 방법, 우수 품종, 색깔과 형태, 길이와 넓이 등 난에 대한 모든 것을 취재하고 전파를 하는 잡지”라고 소개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하고 있다”고 밝히고 “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독자인데 많을 때는 1만9000부까지 발간했다”고 말했다.

 

‘월간 다도’는 “우리나와 중국, 일본은 물론 전 세계의 좋은 차들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차의 정신을 알리고 있는 잡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월간 다도’를 발행하면서 2010년에는 원광대학원에서 예차(禮茶)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 강법선 화백이 지난 9월 난죽전을 찾은 외국인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난의 종류와 제주 한란의 가치는

 

난의 품종은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약 3만종이 된다고 인정할 정도로 다양하다. 꽃과 잎의 모양 등에 따라 종류가 구분된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양란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대만 등 온대지방에서 자생하는 난으로 전 세계 아열대와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양란에 구분된다.

 

춘란은 향기가 있는 듯 없는 듯 미향(微香)이고 꽃은 한두 송이 정도 핀다.

 

중국, 일본, 한국의 남부 지방과 제주도 등지에 분포한다.

 

한란(寒蘭)은 일본 남부와 중국 남부, 대만 등지에서 자라며 우리나라는 제주에만 자생한다.

 

한란은 꽃 한 대에 5~12 송이가 피는데 많게는 36 송이까지 달린다고 한다.

 

한란의 향은 은은하면서도 그윽해 향을 맡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불면증도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강 화백은 “동방무진란(東方無眞蘭·동방에는 참란이 없다)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제주 한란을 몰랐기 때문”이라며 제주 한란의 가치를 높게 쳤다.

 

‘동방무진란(東方無眞蘭)’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우리나라에 중국춘란이 자생하지 않음을 아쉬워하며 한 말이라고 전해진다.

 

▲고향 제주의 의미

 

강 화백은 “고향 제주는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포근하고 정겹고 그리운 곳”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아끼고 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 있는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는 그는 “그렇기 때문에 고향을 떠난 출향인 모두가 마음을 모아서 제주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라미술협회장, 재경제주시향우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제주를 떠난 사람들이 제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뭔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는 또 “앞으로 제주의 관광산업이 고품격 관광으로 체질이 바뀌었으면 한다”는 입장도 전했다.

 

“중국에 많이 다니다보니 중국의 대형 여행사에서 10만명 정도의 관광객을 보낼 수 있다며 제주에 있는 큰 여행사를 소개해달라며 했는데 제대로 돈을 주지 않는 싸구려 관광이었다”며 제주 관광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발전하길 희망했다.

 

제주 관광산업이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 성장으로 바뀐다면 제주의 품격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