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돌 시리즈’ 미술계 충격…세계가 인정한 화가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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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부터 미술에 천부적 소질…대학 재학시절부터 그림 팔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인 첫 입성…네덜란드 여왕도 작품 구입
“제주에 예술고 설치 필요…제주인의 정신 세계로 나가야” 조언
▲ 고영훈 화가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 개인화실에서 달항아리 그림을 배경으로 서 있다.

1970년대 중반 대학생들 사이에 권위와 전통을 중시하는 국전(國展)의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극사실적 경향의 미술을 추구하는 이들이 나왔다.

보도블록, 철길, 군화에서 인물, 정물 등 다양한 주제를 새로운 구도와 독자적인 기법으로 재현했다.

현대미술로서 극사실 회화는 고영훈 화가(65)의 붓끝에서 시작됐다.

1974년 ‘이것은 돌입니다’라는 출품작은 ‘아트 인터내셔널’ 동경 주재 특파원이던 조셉 러브(Josep Love)가 한국 전시회에서 유일하게 호평을 한 작품이었다.

 

▲가난했던 학창시절=그는 1952년 제주동초등학교 인근 마을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로 강제 징용됐다. 종전 후 도쿄에서 아마추어 음악가, 이른바 ‘딴따라’ 생활을 하다 귀국했다.

“어릴 적부터 인분을 똥지게로 지고 가서 밭에 뿌리고, 콩밭과 조팥(조밭)을 메러 다녔죠. 부모는 채소를 오일장에 팔며 생계를 이어갔죠.”

그는 7살 때부터 미술에 두각을 보였다. 동초등학교 재학시절 미술반 교사가 화실을 소개해줬지만 돈이 없어서 다니질 못했다.

오현중학교 미술부 재학 당시 전국대회에서 국제적십자사 총재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은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 화풍을 이룬 천경자 화가였다. “제주도 애가 최고상을 받게 됐다”며 호기심을 비쳤지만 그는 여비가 없어서 시상식에 가질 못했다.

그는 미술 특기생으로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강요배, 백광익, 이석만 화가가 동기였다.

“홍익대 실기대회에서 5명이 올라갔는데 골고루 수상을 하면서 단체상을 받았죠. 서울 모 고교에서 50명이 출전해도 단체상을 받지 못한 것을 오현고 미술부가 해냈죠. 학교에선 특별히 배려해 비행기까지 태워줬죠.”

그는 1976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2년 동 대원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인 홍익대에서 5년 간 강단에 서기도 했다. 1984년 결혼한 부인은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2남 중 장남은 정신과 의사로, 둘째는 카이스트를 졸업해 이공계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 극사실 회화를 처음 시도한 1973년 작 ‘코트’.

▲극사실적 회화 시도=그는 대학시절에도 여전히 궁핍했다. 학과 실기실을 전전에서 동가식서가숙을 했다.

“4년 내내 등록금을 제 때 내 본적이 없었죠. 등록금도 외상을 하며 대학에 다녔죠.”

서울경찰청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누나도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를 성심껏 챙겨줬다. 극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첫 그림은 누나의 ‘코트’였다.

그는 대학 2학년 때부터 대상의 외형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극사실적 회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100호 크기의 화폭에 군화, 배낭, 코카콜라 등을 그렸다. 이는 미국문화와 군부독재의 사회상에 대한 표출이기도 했다.

가난한 화가의 숙명인지 대학생 때부터 그림이 팔려 프로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것은 돌입니다’라는 작품에 이어 내놓은 돌 시리즈는 화단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네덜란드 여왕이 작품 구매=1986년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 화가 최초로 그의 작품이 전시됐다. 샤갈, 브라크, 무어 등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배출한 미술전이었다.

미술전 입상자들과 유럽 투어를 했고, 네덜란드 베아트리체 여왕이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베아트리체 여왕의 소유한 컬렉션은 대부분 고흐와 베르베르, 반 아이크가 그린 명작이었다. 여왕은 편지와 함께 네덜란드 상징인 튤립뿌리를 우편으로 보내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그림을 전시할 당시, 한 설계자가 그가 그린 4개의 돌 그림에 영감을 받아 공모에 당선됐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미테랑 프랑스국립도서관은 그의 작품에서 태동하게 됐다. 이 도서관은 ‘ㄱ’자로 꺾인 거대한 4개의 건축물로 이뤄졌다. 그의 그림에서 4개의 돌을 귀퉁이에 배치한 구도와 닮아있다.

 

▲ 1985년 작 ‘스톤 북(Stone Book)’.

▲그림 값이 가장 높은 화가=파리의 수집가들이 그의 작품을 산 이후 뉴욕의 대표적인 화랑가인 맨해튼 57번가 화랑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루네빌·안시 미술관, 네덜란드 베아트리체컬렉션, 미국 디트로이트미술관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다.

‘스톤 북’ 등 돌 시리즈에 이어 항아리, 접시, 불상, 꽃과 나비 등 한국 특유의 사상과 동양의 우주관을 화폭에 펼쳐온 그는 2014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있음에의 경의’를 주제로 전시를 열었다.

또렷한 형상에서 점점 희미해지며 사라져가는 시간적 공간을 재해석한 캔버스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투영한 정신세계를 쏟아냈다.

그의 작품은 100호 당 1억2000만원을 호가한다. 과거 국내 20곳의 대표 화랑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는 원로·중진화가를 제치고 인기순위 1위를 차치했다.

 

▲ 1979년 작 ‘이것은 돌입니다(This is a Stone)’.

▲최고가 되겠다는 꿈 가져야=그의 그림에는 징표가 많다. 색소폰 위의 아이리스는 아버지를, 코트는 누나를, 책 위에 놓인 돌은 자연과 인간의 문명을, 불상은 희망과 기원을 상징한다.

“홍익대 뒷산에 있는 돌을 그렸는데 감흥이 오지 않아 처음엔 포기했죠. 겨울방학 때 제주에 와서 각양각색의 돌을 보고나서 다시 시도를 했는데 드디어 원했던 작품이 나왔죠.”

그는 지난해 8월 애월고등학교에서 미술과가 운영됨에 따라 고향을 방문, 미술교육 발전과 활성화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고 했다.

“제주에도 예술고등학교가 있어야 합니다. 우수한 교수진을 갖춰야 제대로 된 예술인을 양성할 수 있고 전국에 있는 영재들이 제주에 오게 되죠.”

그는 예술 장르의 다변화를 얘기했다. “미술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디자인과 영상예술이 주목을 받고 있고, 만화도 예술에 편입되고 있다”고 했다.

대학 등록금을 제 때 내보지 못했지만 그는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했다.

그는 태평양전쟁과 4.3사건, 6·25전쟁으로 모든 제주인들은 고난하고 궁핍했다고 했다.

“고향에서 겪은 가난과 역경은 남들이 인정하는 작품을 나오게 한 자양분이 됐죠. 부유하고 편안했다면 화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제주사람이기에 국제화를 지향하고 시야를 세계로 돌려야 한다고 했다. 척박한 환경을 억척스럽게 개척했던 제주인의 정신을 전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1등을 해도 세계에 나가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다”며 “더 넓은 세상에서 이롭고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한다”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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