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본(文庫本)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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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수필가

문고본은 독자가 많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도서를 값이 싸고 가지고 다니기 편리하도록 작게 만든 책을 말한다. 젊은 시절, 내 독서의 팔 할은 문고본이었다. 두꺼운 양장본을 옆에 두고도 먼저 문고본에 손길이 갔다. 어디에 두어도 좋고 아무데서나 읽을 수 있는 게 매력이었다.

1980년대까지는 책을 방문 판매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어 마지못해 책을 구입해야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책들을 집에 들여놓을 때마다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고충도 따랐다.

그렇게 구입한 책들은 한 질에 열권이 넘는 대하장편이거나 전집류가 태반이었다. 한손으로 들기 버거운 사전류도 여럿 있었다. 그 책들을 다 읽기엔 시간에 쫓기는 생활이라 마음 놓고 책을 펼치기도 쉽지 않았다.

그 때 눈길을 끈 것이 문고본이다. 집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인 ‘노인과 바다’나 ‘설국’같은 베스트셀러가 있어도 쪽수가 400~500 페이지가 넘다보니, 언제 이 책을 다 읽으랴 하는 중압감이 앞섰다.

같은 소설이 문고본은 두께가 새끼손가락만 했다. 물론 축약 본이다. 우선 간편하게 지니고 다니며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읽고 나면 노벨상을 수상한 작품을 읽었다는 성취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시절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회사를 오가면서 문고본을 읽었다. 쪽수가 200페이지 안쪽이라 하루에 한 권은 무난하게 읽었지 싶다. 다 읽은 문고본은 집에 두면 아이들이 갖고 놀다가 찢기고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았다. 그 때 문고본 책값은 비교적 싼 편이었다.

지금 내게 남아있는 문고본이 일본어판까지 해서 모두 스무 권 쯤 될 것이다. 그 중에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는 154쪽 짜리다. 이런 얄팍한 문고본을 요즘엔 구하기 쉽지 않다.

일본어판 문고본도 거의가 200페이지를 넘지 않아 쉽고 편하게 읽힌다. 책값도 300~500엔 미만이라 일본을 여행할 때나, 지인들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구입했다. 몇 해 전 책을 정리하면서 두껍고 오래된 책들과 퇴색한 문고본을 많이 버렸다. 버리고 나니 신중하지 못했던 게 후회되기도 한다.

요즘 일본에서는 문고본을 읽는 인구가 늘어나 유명한 문예춘추(文藝春秋)사 사장이 가능하면 도서관에서 문고본 대출을 자제해 줄 것을 호소할 정도다. 적어도 문고본은 직접 사서 읽어주기 바라는 간절함을 피력한 것이다.

국가적으로 독서를 권장하면서도 독서에 대한 분위기 조성이 빈약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문고본만 해도 그렇다. 일본에서는 독서의 비중이 문고본으로 쏠려 존재감이 부각되는데, 우리는 어떤가. 안타까운 대목이다.

좀 객쩍은 얘기지만 가끔 지인들이 보내주는 자전적 에세이를 대할 때면 책을 얼른 펼치기가 망설여진다. 책이 두껍고 양장본으로 잘 치장된 게 위압감을 유발하니 말이다. 이런 책들은 읽어보라는 게 아니라 잘 간직해 두길 바라는 뜻한 선입감이 앞선다. 책의 내용보다 외면에 신경 쓴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내 글을 읽어주기 바랍니다.’ 하는 마음이라면 쪽수가 200~250페이지를 넘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따금 400쪽 넘는 수필집이나 회고록을 받을 때는 이 책을 두 번에 나누어 발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우지 못한다.

두꺼운 책일수록 읽는 순위가 밀리게 마련이다. 쉽게 손에 잡히는 책이 만만하게 읽힌다. 일본의 어느 저술가는 80권 넘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그 중에 70권이 문고본이었다. 문고본이 독자에게 인기를 끄는 게 일본 만이 아닐 것이다. 문고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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