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준康祐俊:1905(광무8)~1972, 행정가, 제13대 제주도지사. 본관은 신천,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나 제주농업학교 3년을 졸업, 1963년 12월 19일에는 제주신문사 사장 강우준이 제13대 제주도지사로 발령되고 김영관 전 지사는 해군으로 원대 복귀했다.


강 도백은 처음 전남 여수군 화양면사무소의 서기로 공직을 시작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어 전남 영광靈光군 군남郡南면 면장으로 승진하였다.

 

1952년 북제주군 내무과장으로 고향과 인연이 깊어졌으며 1955년 5월 북제주군수로 발령되어 4년 9개월간 재임하였다.


1961년 2월 전 국회의원 김두진金斗珍의 지분 주식을 인수, 제주신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2년 11월 군사정부의 언론통합 정책에 의해 제민일보濟民日報(사장 김선희金瑄熙)와 합병, 제주신문으로 이름하여 강우준은 사장이 되고 김선희는 전무로 임명됐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되면서 군사정부의 민정이양이 가속화되었다.


강도백康道伯은 도정 방침을 ‘복지제주 건설’에 두고 인화단결, 솔선수범, 친절봉사, 직책 완수 등을 강조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세 차례 제주를 방문한 바 있었으나 동년 3월 14일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제주를 찾았다.


첫 민정民政 도백으로 발탁된 강지사는 도정 파악에 여념이 없던 때라 초도순시가 매우 부담스러웠다.

 

전임 김영관 도지사 때부터 거론되어온 ‘제주도 종합개발계획’ 기본안을 어떻게 보고해야 하느냐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1차로 개간·수산·제당·토목·국립공원 설치 등 5개 분야로 나누어 수립, 독자적인 개발계획이어서 실현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한편 강지사가 종합개발 계획안을 대통령에게 설명하니 “음 잘 돼 있군!”하면서 칭찬하였다.

 

   
▲ 1960년대 정부가 운영하던 대한항공공사 여객기 모습. 제주비행장 활주로가 포장된 것은 1958년 1월로, 활주로의 길이는 1000m, 너비 30m에 불과했다. 1958년 3월 14일 국내 처음으로 서울, 부산, 광주, 강릉과 더불어 제주비행장을 설치하게 되니, 모슬포비행장을 이용하던 군용기가 모두 제주비행장을 이용하게 됐다. 제주비행장에 항공교통수단으로 항공기가 처음 취항한 것은 1949년 2월 1일, 대한민항공기인 KNA로 4인승 미제 스틴슨이다. 1962년 대한항공공사를 발족시키고, 1963년부터 국내 정기노선에 다시 취항함으로써 제주의 정기노선도 부활됐다. 1969년 2월 28일 대한항공공사를 한진상사에 넘기고, 이에 따라 3월 1일부터 KAL은 민영으로 출발하게 됐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이날 횡단도로로 서귀포에 갔으며 지역인사들에게 제주개발은 일주도로 포장, 급수시설 확충, 제주항 확장 등 3대 사업을 적시했다.


1964년 8월 17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기관장 및 실업인 연석회의는 제주도종합개발계획에 대한 강도백이 경과보고를 했다.

 

동년 10월 20일 ‘제주도 종합개발계획안’이 중앙심의위원회에 최종 부의되었다.

 

개발기간 10년 동안에 국고 140억 원, 융자 63억 원, 자체부담 12억 원 계 216억 원을 투자하여 10년 후 투자에 의한 순이익은 총 투자액의 20.5%인 44억 원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새해에 강도정康道政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겨울 가뭄’이었다.


격일제 급수가 불가피하고 5㎞ 이상 떨어진 곳에 가서 식수를 운반해 오는 마을도 36개이고 5㎞ 이내의 마을도 57개에 달했다.


국무총리실 상황실에서 ‘제주도급수대책회의’가 열렸다.

 

국무총리 기획조정관을 비롯해 경제기획원, 내무·국방·건설·농림·보사부 등의 기획관리실장 등이 참석, 강康지사의 보고를 듣고 참석자들은 “가뭄 문제는 시급한 만큼 현재의 응급대책을 그대로 지속하면서 항구대책에 소요되는 예산은 추경에 반영토록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1965년 1월 30일 국고 800만 원과 지방비 200만 원으로 지하수 12개소에 심정굴착 작업을 착수하였다.

 

이 해 2월 20일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의 초도 순시차 내도, 가뭄 현장과 심정굴착 현장을 보고 다음날 서귀포 지역인사와 간담회를 가졌는데 교포 정서룡丁瑞龍이 “작년 고향에 설치할 전기 기재 600만 원어치를 갖고 왔는데 통관되지 않으니 선처해 달라.”고 했다.


그로부터 5일 후에 부산세관을 모두 통관하였다. 이때 재일교포의 재산반입 규제완화와 제주비행장 확장이란 정부측의 약속을 받아냈다.


이어 박대통령이 3월 3일 다섯 번째로 제주를 방문했다.

 

이 날 오후 현지에서 개최된 경제각료 회의에서 전원개발 및 전화電化시설, 수산개발 및 가공시설, 농업개발 사업, 관광시설, 지하수 및 급수시설 등을 위해 반입되는 재일교포의 재산은 면세할 수 있도록 규정이 마련되었다.


박대통령은 “재일교포가 고향에 기증하는 감귤묘목에 대해서는 종묘법을 개정해서라도 통관할 수 있도록 하라. 일본산 묘목이 국내산 묘목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외화 소비가 없다면 법규를 고쳐야 한다”고 강지사에게 지시했다.또 “제주는 물 문제가 가장 급하다. 성판악과 어승생에 있는 수자원을 남·북군에 각각 파이프로 연결해 식수를 강구하고 정부가 책정한 800만 원의 급수 시설비와 700만 원의 수원 조사비는 도지사 재량에 맡기겠다”고 했다.


1965년 8월 18일 박대통령은 돌연 여섯 번째로 제주를 찾았다.

 

대통령은 정국수습책을 구상하기 위한 듯 도정보고를 물리친 채 서귀포에서 2·3일 체재하고 갔다.


1966년 1월 24일 강도백은 의원依願 면직되고 후임에 전 서울시경찰국장 정우식鄭雨湜이 도백으로 발령되었다.

 

   
 

▲강운옥康雲玉:1906(광무10)~1991, 시인, 교육자. 남제주군교육구 교육감. 본관은 곡산.


호는 해심海心. 서귀포시 하효<쉐둔>마을에서 강재구康才龜의 6남 중 5남이다.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1926년 3월 간사이대학<關西大學> 전문부 예과 졸업, 1952년 8월 8일 남제주교육구의 초대 교육감에, 또 1957년 4월 제2대 교육감에 재선되었다.


불교에 귀의한 불자이며 문인들과 사귀며 풍월을 읆었던 시인이었다.

 

앞서 1962년 9월 남주南洲고등학교 교장으로 2년 재임, 1967년 5월 제주도교육위원으로 피명되었다.


1998년 2월 9일 월요일에 그의 유품 공개 모임을 가졌다.

 

서귀포향로당 시우회를 창립, 회원 30명이 월 2회 즉 초하루 보름날은 시회일詩會日로 작품 활동을 도모하였다.


어릴 때 한문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1920년 서귀포에 공립보통학교가 개설되자 중도 편입하여 1921년 3월에 4학년을 졸업하였다.


이듬해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하였다. 1928년 11월 19일 전남 보성군寶城郡의 벌교伐橋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첫 출발, 1931년 모교인 서귀교西歸校로 영전, 8년 재임하고 1938년 대정보통학교로 이동되었다.


한 달 뒤 대정교 부설 구억九億간이학교가 개설되자 오지를 마다 않고 자원하여 부임하였다.

 

1943년 4월 대정교로 환원, 소위 전시교육 체제로 들볶던 시절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으로 야마나카<山中貞治> 교장은 “일본 천황은 나를 속였다”는 말을 남기고 몰래 본국으로 돌아가고 미군정이 실시되어 동년 9월 21일 대정교의 초대 교장으로 발령되고 동 11월 30일 신효교 교장으로 금의환향하였다.

 

1946년 9월 남제주군 장학사로 발령, 5년 동안 재임하면서 광복 초기의 장학업무와 교육행정의 기반을 쌓아 놓았다.


혼란의 해방공간에 더구나 4·3 사건으로 혼미를 거듭하던 그런 와중에 힘든 직무를 수행하였다.

 

1950년 6월 모교인 서귀교 교장으로 발령되니 20년 전을 회고하면서 산남의 대표적인 학교로 발전시켰다.


재임 1년 반 만에 제주도 학무과 장학사로 발탁되어 행정 솜씨를 발휘하였고, 초등교육에 대한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어 교육위원의 선거에 의해 인간 강운옥의 신념과 신앙과 풍류는 오로지 교육을 통하여 참된 인간을 육성하는 데 골간骨幹을 두고, 해심海心의 사상의 원류는 유교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이를 교육의 방략으로 삼았다. 


해심은 1958년 정의향교 석전제釋奠祭의 초헌관으로, 또 1976년 2월 유도회 총본부에서는 정의旌義지부장으로 위촉되었다.

 

해심은 1976년 5월 서귀포노인학교 교장이 되면서 재임한 7년 동안은 산남지방이 한시의 중흥 시기였다.

 

아들 가운데 막내 강근복康根福은 충남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