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조 교수가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기조 중앙대 공예학과 교수(58)는 ‘조선백자의 미를 현대적으로 가장 잘 풀어낸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도예가다.


“독 짓는 늙은이가 되려고 하느냐”는 동료들의 비판에도 선비처럼 여유롭게 살고파 도자기 전공을 택했던 그가 지금 현대 백자의 거장(巨匠)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미(美)를 되살리고 있다.


“제주에서 태어나 최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느끼며 성장했기에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는 그는 제주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백자의 美는 무엇인가


이 교수는 “백자의 미를 알기 위해서는 백자의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시대의 청자가 조선시대 초기에 분청사기로 변모했고, 그 후 백자가 조선 사대부의 사랑을 받게 된 흐름을 짚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자는 조선의 사대부와 관료들, 그리고 도예가들이 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그는 “백자의 미를 이야기할 때 당시 조선 문화를 주도했던 사대부들의 미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유교 사상을 지배했던 미의 기준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원초적인 감각들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백자가 완벽함을 넘어서 찌그러진 것까지 허용하는 관용미도 있었다”고 해석한다.


당시 백자를 만들었던 주체들의 생각이 재료와 작업 과정에 대한 진실성이 있었으며, 꾸미거나 잘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들려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특히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은 태토(바탕흙)의 맛이라고 본다”고 밝히고 “흙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진실성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청자와 백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교수는 “미술사가들은 청자와 백자가 불교와 유교라는 종교적 차이에서 비롯됐다고도 하지만 저는 흙의 차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백자에 쓰는 흙은 돌이 풍화돼 산에서 나는 1차 점토로 색이 하얗고 점력이 떨어져 푸석푸석하고 힘이 없어서 얇게 만들지 못하고 두껍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청자의 흙은 풍화된 흙이 빗물에 씻기고 바닷가 근처에 퇴적된 2차 점토인데 발효되고 숙성돼서 점력이 좋고 입자가 곱지만 불순물도 많다고 한다.


그는 또 “청자의 비취색은 유약의 영향도 있지만 흙속에 들어있는 철분이 환원 반응을 일으킬 때 발생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청자는 유약의 맛이고 백자는 흙의 맛”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백자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이 교수는 늘 마음속에 조선백자의 전통을 이어야겠다는 소명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혜전대학교 도예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릇 만드는 걸 가르치다가 우리 민족에게는 조선백자라는 훌륭한 뿌리가 있는데 서양 도자기만 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단절된 조선백자의 명맥을 이어야 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백자를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조선백자에 몰입한 그는 조선백자의 재현에 국한되지 않고 어떻게 현대적으로 풀어낼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단순히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만지고 들어보고 하면서 나름대로 느낌을 체득하려고 노력했다”는 그는 국내 및 일본의 박물관, 수집가 등을 찾아다니며 많은 작품들을 보며 나름대로 백자를 바라보는 안목부터 높였다.


그는 “최고의 조선백자를 찾아 20년을 쫒아 다녔다”고 밝히고 “미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단언했다.

 

   
▲ 이기조 교수가 기본 구상이나 스케치 없이(no idea, no sketch) 점토판을 잘라서 붙이는 판성형 방식으로 만들어낸 작품들. 작품 왼쪽은 백자 사각 수반. 오른쪽은 화병.

▲조선백자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 했나


이 교수는 “조선백자의 미를 알려면 조선백자의 특징부터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중 하나가 단순함인데 무미건조하고 맛없는 단순함이 아니라 뭔가 함축돼 있는 단순함”이라고 밝힌 그는 이 단순미에 더해 조선백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 왔다.


그래서 단순함의 한 형태, 형식미로서의 면(面)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판 작업을 시작했다.


“판의 구조를 갖고 현대적으로 조선백자의 미를 풀어보려고 했다”는 그는 “태토의 질감을 어떻게 살릴 것이냐 하는 고민도 많이 했다”며 그동안 부단한 노력과 연구 과정도 설명했다.


▲조선백자의 명인으로 세계적 인정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매회사로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있다.


그런데 크리스티가 조선시대 도자기의 맥을 이어서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현대 작가의 작품을 경매에 올리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 때 이 교수가 선택됐다.


2004년 국내 현존 작가로는 최초로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2점의 작품을 출품, 모두 낙찰됐다.


당시 조선백자의 미를 현대적으로 가장 잘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2014년에도 두 번째로 크리스티 경매에 참가했다.

 

조선백자의 특징과 보자기의 이미지를 더한 ‘화병(花甁)’ 작품 3점을 출품했는데 이 때도 완판됐다.


이 교수는 프랑스 파리의 메종&오브제, 미국의 필라델피아 Craft Show, 이탈리아 밀라노전, 세계현대도자전 등 국내외를 넘나들며 개인전과 전시회에 참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1980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1980년, 1982년, 1984년 중앙미술대전 입선, 1981~1985년 동아미술전 입선, 1984년 동아미술상, 1987, 1989년 대한민국 공예대전 특선, 일본 남서원전 수작 및 대상 등 각종 상을 받기도 했다.


▲성장 과정과 고향 제주가 주는 의미는


이 교수는 제주시 이도2동 출신으로 광양초와 제주일중, 제주일고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부였던 그는 계절 구분없이 매주 한라산을 오를 정도로 ‘산귀신’이었다고 한다.

 

그 때 한라산을 자주 찾은 게 지금 감성적이나 육체적으로 예술 활동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제주는 저를 낳아준 곳이고, 저 스스로가 제주스럽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최고의 아름다운 자연을 갖고 있는 제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최고의 미적 감각을 갖게 됐다”며 고향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최고의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고향이 제주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는 이력서를 쓸 때도 제주 출신임을 반드시 쓰고 있다고 했다.


“제주도는 풍광, 기후, 자연환경이 주는 특별함이 있다”는 그는 “개인적으로는 제주의 비바람 치는 모습을 가장 좋아 한다”고 했다.


▲제주의 미래 발전 방향에 대한 제언


이 교수는 “제주는 천혜의 경관이라는 절대 자산을 갖고 있다”고 전제, “그렇기에 절대 자산 안에 품어야 할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 콘텐츠가 바로 문화”라고 규정한 그는 “자연과 문화를 양대축으로 할 때 제주의 미래는 더욱 밝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이어 “문화적 콘텐츠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제주 출신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최고의 콘텐츠를 갖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을 제주로 유인하는 장치를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국내외 최고의 예술가들이 올 수 있는 토양과 기반을 만들어 준다면 제주도가 세계적 명소로 각광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교수는 차후 제주에 문화공간을 만들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한경면 낙천리 지역에 작업 공간과 미술관, 레지던스 시설 등을 갖춘 문화센터를 설립, 세계적 유명 작가들을 초청해 학생 및 도민들과 공동 작업을 하고, 갤러리 전시는 물론 문화·음악·인문학 강좌 등을 열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