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시대, 다시 추사와 대향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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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

제주도에는 시대를 달리한 두 사람의 외지인 예술가가 있다. 한 사람은 조선시대 유배인 신세가 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온 선비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로 피난을 온 화가이다. 추사(秋史) 김정희와 대향(大鄕) 이중섭, 이 두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제주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정희는 조선시대 바람 많은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유형지 대정현에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고, 이중섭은 더는 갈 수 없는 최남단 영토의 끝, 한국전쟁의 마지막 피난처 서귀포에서 1년 가까이 피난살이를 했다.

시대는 달랐지만 그들의 섬에서의 삶은 혹독하기만 했다. 두 사람 모두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나 김정희는 정치적 이유로, 이중섭은 전쟁 때문에 섬에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고달픈 섬에서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제주도에서 모진 고난을 견디며 꿋꿋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김정희는 바람 많은 대정에서 폭낭(팽나무)을 닮은 추사체를 완성했고, 청나라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을 제주도로 보내준 역관(譯官) 이상적에게 변치 않는 그의 마음에 대한 보답으로 그린 시대의 역작, 세한도(歲寒圖)를 남겼다. 의절(義節)의 상징이 된 세한도는 논어 자한 편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중에 시듦을 안다)’ 라는 공자의 말에 연유하여 그린 것이다.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유형(流刑)의 섬, 제주는 높은 자리에 올랐던 추사에게 추락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 되었고, 그에게 비로소 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주는 창작의 장소가 되었다.

피난민 배급으로 근근이 연명했던 이중섭은 고달픈 상황에서도 결코 그림에서 손을 떼지 않았으며, 그 힘겨운 삶의 여정을 ‘서귀포의 환상’과 ‘은지화’ 등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서귀포 자구리 해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게(蟹)를 잡고 놀다가 집으로 가져와 반찬으로 삼은 것이 미안해서 게를 많이 그렸다는 이중섭. 그는 담뱃갑 속 은박지에 게와 물고기, 아이들, 가족을 그려 넣음으로써 숭고한 가족 사랑의 의미를 따뜻하게 담아냈다.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피부 깊숙이 느끼게 해준 기쁨의 창작 공간이었다.

2017년 12월 찬 겨울바람이 다시 섬을 휘돈다. 자연은 만물이 자라는 터전이다. 예술 또한 그 자연의 터전에서 싹을 틔운다. 최남단 서귀포의 자연은 김정희와 이중섭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서, 그들에게 창작할 수 있는 혜안을 열어주었다.

가치는 그 시대의 사회적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 제주에 대한 인식도 문명의 진보에 따라 변했다. 과거에는 제주가 거칠고 척박한 땅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재인식되고 있고, 인문 자원인 예술의 중요성도 부각되고 있다. 이미 제주도의 문화자산이 된 김정희와 이중섭에서 알 수 있듯이, 미래 시대에는 문화적 자원이 관광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제 제주의 남쪽, 제주관광 1번지 서귀포는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 보석이 되고 있다. 그 비전은 바로 생태적 자연, 문화 예술의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오늘 우리는 김정희와 이중섭의 삶을 기억하며 다시 제2, 제3의 추사와 대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닌, 준비된 제주인의 넉넉한 가슴으로 맞는 것인데, 이 기다림의 결과는 제주다움의 토양이 생생히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시민의 정신세계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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