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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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 수필가

심신이 마른 나뭇잎처럼 느껴질 때면 길을 나선다. 일상적인 동네 산책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오후 늦게 종종 들락거리는 원당봉 대신 사라봉을 향했다.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주차하고 혼자 여유롭게 야자매트 길을 밟는다. 높다란 잡목들 사이로 접어드니 이내 마음에 생기가 돌며 새로운 생각들이 따라나선다. 머리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사유의 조각들을 빨아올리는 느낌이라니, 걷기의 매력이다.

쿵쿵 밟으면 지구 반대편이 울릴까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바다가 보이는 별도봉 중허리에 이른다. 계단으로 정상을 오르기가 버거워 바다와 면하는 둘레길을 택한다. 길섶에서 노란 노박덩굴 열매와 마주친다. 집에서 애정으로 가꾸는 분재와 겹치니 연인처럼 정겹다.

길가의 동백나무들은 수많은 봉오리를 매달고, 전령처럼 몇 개는 빨간 꽃잎을 펼치며 겨울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린다. 진즉 나목으로 수행 중인 벚나무가 있는가 하면, 아직도 노란색과 갈색을 섞으며 공중에서 잎의 군무를 펼치는 녀석들도 있다. 같은 종인데도 자리 탓일까, 그들의 개성 탓일까.

예전에 읽은 다양성은 생존의 조건이라는 내용의 글이 떠오른다. 일정한 생명 집단을 이루는 개체들이 모두 동일하다면, 외부의 간섭이나 침투에 획일적인 반응으로 매우 취약하거나 치명적일 수 있다고 한다. 다양성의 정도와 생존 가능성은 비례한다니, 흔히 ‘다름’을 ‘틀림’으로 배격하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된다.

억새꽃의 춤사위와 애처로운 풀꽃에 눈을 맞추며 걷노라니 어느새 사라봉 입구에 들어선다. 오가는 사람들이 다양하다. 달리기로 체력을 키우는 젊은이들, 속보로 건강을 돌보는 중년들, 느림을 구가하는 노년들도 보인다.

정상의 망양정에 올라 일망무제의 사위를 둘러보면 마음이 확 트인다. 온갖 것을 다 품을 듯한 자연 속으로 녹아든다. 멀리 한라산과 그 자락에 올망졸망 어깨를 결으며 내뻗은 오름들의 유연한 곡선미가 눈부시다. 고개를 돌리니 남빛 바다가 깊은 잠에 빠진 듯 잔잔하다. 수반 위에 올려놓은 평원석처럼 관탈섬이 가까이 다가온다. 원근을 조율하는 시간의 마술인가 보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생의 운명처럼 발길을 돌린다. 올 때 깊이 간직했던 사유의 한 가닥을 꺼낸다. 칡넝쿨이다. 별도봉 산책로 입구를 지나 아래쪽으로 ‘애기 업은 돌’까지 거의 100m의 주위를 길게 장악했다. 곁에 등나무가 없으니 조금의 갈등도 없이 식물의 제왕으로 등극한 형세다. 승자독식을 보여주듯 기세등등하다.

신의 언어는 다양하다고 한다. 심이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전하기도 하고, 자연을 통해 암시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 명백히 드러낸 의미는 무엇일까. 칡넝쿨을 닮으라는 것일까, 닮지 말라는 분부일까.

우리 사회에도 칡넝쿨 같은 화두가 몇 개 있다. 이를테면 ‘적폐청산’이니 ‘내로남불’이니 하는 말이다. 매우 정의롭게 들리지만 인간애를 수반하지 않으면 해석의 양면성을 낳고 갈등의 씨앗을 움틔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은 어떤가. 정이 넘치는 따뜻한 목소리다. 사람의 외연에는 응당 남녀노소, 너와 내가 포함되리란 믿음에서다. 시간이 흐르면서 온기를 잃어 가는 건 아닐까 우려된다. 이념이나 사상이 같은 사람들로 울을 두르는 느낌 때문이다.

시작인가 했더니 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에서 추위를 탄다. 기도로 온기를 지펴야겠다.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이 실현되기를, 작지만 아름다운 어휘들이 촛불처럼 빛나기를, 그리고 새해에는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는 말과 함께 각자의 소망을 이루는 행운의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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