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비둘기 앉은 곳, 집 지으면 가문의 운명을 지탱할 수 있소”
(59)“비둘기 앉은 곳, 집 지으면 가문의 운명을 지탱할 수 있소”
  • 제주신보
  • 승인 2017.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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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의 원묘-‘반득전 혈산 묘지 설화’…호종단이 권한 자리에 부친 장례 치러
손자 김만일, 의귀리 감목관 직 세습…대대손손 부귀영화 누려
제주 원묘 중 현존 가장 오래돼…잡담처럼 그대로 쌓은 방식
▲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반득이 왓에 있는 경주 김씨 김보의 원묘. 문인석 두 기가 좌우에 놓여있다.

▲김보의 무덤


경주 김씨 집안은 제주도 무덤의 양식사적인 흐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본보기를 보여준다.


방묘는 입도조 김검룡(金儉龍)의 쌍묘에서부터 입도 2세 김용신(金用信)의 방묘, 그리고 그의 아들인 3세로서 맏이인 맹수(孟粹, 1395~1463)는 순천에 터를 잡은 관계로 제주에 무덤이 없다.


또 둘째 아들 중수(仲粹) 마저 육지로 출타한 관계로 후손들은 미상(未詳)이다.


막내인 계수(季粹, 1400~?)는 방묘이다. 또 입도 4세인 김자신(金自愼)은 계수(季粹)의 아들로 3남 중 맏아들이다.


김자신의 무덤은 합묘로 된 방묘인데 김자신의 아들인 보(譜, 1500년경~1562)부터는 원묘로 무덤을 조성했다.


한 집안에서 이렇게 한꺼번에 무덤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김보의 벼슬은 가선대부 형조참판이다. 아버지는 김자신이고 어머니는 복성 문씨이다.


부인은 숙부인 양천 허씨로 허형(許亨)의 딸이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이 이홍(利弘)이고 손자는 헌마공신 오위도총관을 지낸 김만일이다.


둘째는 언홍(彦弘)으로 贈형조참판을 지냈다.


손자는 4남을 두었다. 막내는 의홍(義弘)으로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


김보는 명종(明宗) 임술년(壬戌年, 1562) 8월 17일에 돌아가셨다.

 

▲ 복두공복상 화강석 문인석.

▲김보의 석인상


김보의 무덤은 반득이 왓(班得田) 남쪽(子座午向)을 보며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쌍분은 조선 초기의 무덤 양식인 원묘이다. 이 무덤은 기울기가 약 3~5도가 되고 산담이 조성되었는데 산담 모양이 고형(古形)이다.


산담  뒷쪽 담은 1m 60cm로 높고, 앞쪽 담은 개방된 형태인 ‘앞튼 산담’으로 높이가 70cm 밖에 안 된다.


지형의 기울기 때문에 좌우 측면 산담이 앞으로 올수록 내리막을 형성하고 있고 산담도 점점 낮아진다.


비석은 원래 옛 비석이 있었으나 1929년 늦봄에 세 분의 후손이 함께 세웠다.


원래의 비석은 화강석의 작은 비석이었으나 오랜 세월로 마모되어 글자를 알 수 없어서 다시 말각형 조면암 비석을 세웠는데 이때 속돌로 상석과 향로석을 같이 만들었다.


옛 화강석 비석은 길이 90cm, 넓이 36cm, 두께 16cm로 비석 머리로 연꽃 줄기(荷葉) 모양으로 추정된다.


문인석은 좌우 두 기가 있는 데 왼쪽 동쪽에 세워진 화강석이 뒤로 많이 누워있다.


문인석은 고려시대의 양식은 복두공복상으로 지형이 바람이 잘 들지 않은 곳이어서 오른쪽 문인석 보다 왼쪽 문인석이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왼쪽 석인상의 크기는 전장 146cm, 넓이 45cm, 두께 25cm이고 두 손을 모으고 홀을 들었다.


오른쪽 석인상의 크기는 전장 142cm, 넓이 35cm, 두께 26cm이고 두 손을 모아 홀을 들었다.

 

산담은 남원읍 한남리의 흔한 돌을 모아 잡담으로 쌓았다.


왼쪽에 신문을 만들었는데 넓은 판석으로 두 단의 계단을 놓아 오르도록 하였다.


부부묘의 산담치고는 매우 우람하다. 아마도 명문가로서 노비들이나 부리는 사람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대체로 경주 김씨 김만일가의 산담은 잣성처럼 크게 쌓은 것이 특징이며 김만일 아들이나 손자대에 이르면 무덤의 석물 또한 잘 갖추어져 있다.

 

선대부터 육지의 석물 문화를 잘 받아들여서 그런지 다른 집안의 무덤보다도 석물이 크고 종류도 많다.


▲제주의 대표적인 명당 반득이 왓 설화


김보와 관련된 반득전 혈산의 묘지 설화는 호종단과 관련된 설화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물론 연대로 볼 때 호종단과 김보와의 만남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김보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복 차림으로 버섯을 따러 반득이 왓으로 올라가 나무숲을 헤치고 있었는데 사람이 없는데도 우연히 땅에 철침이 박혀있는 것을 보고 무심코 뽑아 던져버렸다.

 

한편 호종단은 아무리 지맥을 찾아 혈을 눌러도 지맥이 죽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 박아놓은 압침을 찾아보니 그것이 없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상복 차림을 한 사람이 버섯을 따고 있음을 보고, “혹시 이곳의 압침을 보았느냐.”라고 물었다.


김보가 대답하기를 “산중에 철침이 있는 것이 괴이하여 뽑아 보았으나 별 신통한 것이 아니어서 던져버렸다”라고 했다.


호종단이 김보의 기상을 보니 하늘의 복을 타고 난 것이 분명하므로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호종단은 다시 김보에게 말했다.

 

“나는 호종단이라는 사람인데 제주에 도착하자 산수정기(山水精氣)가 나를 중국인이라 배척하여 해치려 듦으로 혈맥을 자르고 있는 참이었소. 그런데 공이 우연히 이곳까지 와서 압침을 뽑아버리게 된 것은 신이 도와 혈지(穴地)를 얻게 함이니 내 천리(天理)를 쫓아 공(公)을 인도하리다. 보아하니 상중(喪中)이신데 이 혈에 무덤을 쓰면 당대발목(當代發福)하여 자손이 번성하고 부귀영화로 귀하게 되고 또 재산이 늘어 천만금의 부자가 돼 그 이상으로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 것이오”  하는 것이었다.

 

이에, 김보는 호종단에게 제일(祭日:장례일)을 청하였다.


그러자 호종단은 땅을 살피고는 김보에게 가리키는 땅을 힘주어 밟고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김보가 땅을 밟자 호종단은 흩어진 지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윽고 김보의 발바닥은 뜨겁기 시작했고 진동이 강해짐을 느끼자 무의식중에 발을 움직였더니 비둘기 한 쌍이 나와 한 마리는 의귀리 옛 종가댁 터로 날아가고 다른 한 마리는 서쪽으로 사라졌다.


김보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호종단이 말을 이었다. “이것도 공의 복이요.”하면서 김보가 밟았던 자리에 제일(祭日)을 주고 난 뒤 “지금 비둘기 날아서 앉은 곳을 찾아 집을 지어서 살면 국운이 다할 때까지 가문의 운명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오.”하고는 김보의 인사에 답하면서 총총히 떠나갔다.

 

그 후 김보는 아버지의 장례를 자신이 밟았던 자리에 치렀는데 이것이 반득전 혈산(穴山)의 유래가 되었다.


김보의 집안은 후에 김만일이 등장하면서 이름 있는 명가가 돼 의귀리를 거점으로 해서 감목관 직을 세습하면서 대대손손 부귀와 영예를 누렸다.


김보의 무덤은 남서쪽으로 약 150m 거리에 아버지 김자신의 방묘가 보이고, 바로 그 뒤로 현손인 김반 무덤과 손자 며느리가 묻혔다.


이 손자며느리가 바로 김만일의 계비이다.


▲처음 시작된 앞튼 산담 양식


김보의 원묘를 필두로 그의 아들 김이홍, 손자 김만일 등이 모두 원묘이다.


제주의 원묘 가운데 김보의 원묘가 현존 가장 오래된 무덤이다.


그리고 원묘의 산담 또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데 이 산담을 통해 산담 초기에는 지금이 산담과는 축조 방법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담 안측과 바깥 측을 굵은 담으로 쌓고 그 사이를 채운 것이 아니라 잡담처럼 그대로 쌓는 방식을 취했다.

 

또 산담 앞쪽으로 앞을 볼 수 있게 낮춘 것은 김보 무덤이 제주에서 처음 있는 앞든 산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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