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선택
삶의 선택
  • 제주신보
  • 승인 2017.12.1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길주, 수필가

어느 친구의 넋두리다. 부모가 좋은 배필감을 주선해 줄 때마다 내년 후년 미루다 혼기를 놓친 딸 이야기다. 이제는 아예 독신주의자 행세란다. 저 혼자 솔로의 자유를 맘껏 구가하며 신바람을 내지만 부모는 그런 딸의 행태가 불안하기만 하단다. 요즘은 혼자 사는 딸 생각에 밤잠 설치기 일쑤란 하소연이다.

또한 친구는 아들에 대한 푸념이다. 부모의 권유와 바람을 무시하고 엉뚱한 대학에 들어가더니만 지금은 남의 눈칫밥이나 먹고 산다며 서운해 한다.

그러나 부모가 맺어준 사람과 결혼했다고 잘 살았을 보장은 없다. 부모가 바라는 대학에 진학했다고 만족한 직업을 얻을 것이란 기대도 반반이다. 어쩌면 더 비참 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선택을 스스로 했다는 게 더 중요하다. 실패도 인생의 중요한 이력이다. 공짜 성공도 없지만 공짜 실패도 없다. 실패의 이력은 더 성숙한 안목과 비전을 갖추게 하여 더 높은 삶의 경지로 올라서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어차피 인생은 자기 몫이다. 부모의 당부나 여타의 조언은 그저 참고 사항일 따름이다.

우리의 삶은 갈등과 선택의 연속이다. 아침 식사는 무엇으로 할까? 나들이에 무슨 옷을 입을까? 여행지는 어디로 정할까?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은 하나같이 선택 사항이다.

생애 설계라고 다르지 않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을 나와 직장에 다니는 일까지도 선택에서 예외는 없다. 결혼 상대나 출산 계획, 집 장만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따라가든, 누구의 삶을 모방하든 결국은 자기 의지에 의한 선택일 뿐이다.

이런 삶의 갈등과 선택의 모자이크가 인생이다. 어떤 이는 우아한 명품을, 또 어떤 이는 흉스런 졸품 인생을 모자이크한다. 결국 삶도 인생 여정도 스스로 모자이크하는 것이니 제 운명이 엿 같이 꼬인다 해도 제 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선택의 결과가 두려워서 우연이나 기적만을 바란다면 인생에 아무런 변화도 찾아오지 않는다. 정체의 늪에서 헤매야 한다. 자신이 선택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행운의 여신은 비로소 미소를 보낸다.

미국의 유명한 인권지도자였던 킹 목사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가 젊었을 때 수레를 끌고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워낙 무거워서 누군가 뒤에서 수레를 밀어주었으면 싶었다. 그는 수레를 세우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에 우두커니 서서 수레를 밀어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수레를 밀어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그의 곁을 스쳐 지났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무거운 수레를 끌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숨이 턱턱 막혔다. 바로 그 때 그 힘든 모습을 본 어느 행인이 뒤에서 수레를 밀어주는 것이다.

그렇다. 행운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의 몫이다. 부모에 기대어 살거나 누구의 도움에 의지하여 사는 건 행운을 기다리는 삶이다. 행운이 저절로 찾아들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거운 삶의 수레를 스스로 땀 흘리며 끌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기 삶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그의 저서 ‘인생의 절반, 절반의 선택’에서 ‘부모나 가족, 또는 친구의 도움에 의지하여 자신의 선택을 미루면서 수동적으로 살아왔다면 나머지 인생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하면서 행복을 찾아 나서라. 하루하루가 내 생애에 최고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당당하게 세상을 살라’고 설파한다.

세밑이다. 춥고 배고픈 이들이 어려운 시기다. 사랑과 자선으로 올해의 피날레를 내 생의 한 켜에 우아하게 모자이크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