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한계선
수목한계선
  • 제주신보
  • 승인 201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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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선/수필가

차가 멈췄다. 열린 문으로 로키 산맥 찬바람이 머플러를 고쳐 맬 틈도 주지 않고 밀려든다. 두꺼운 점퍼를 단단히 여미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일행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머릿속이 찡하다. 눈앞에 먹물을 가득 묻힌 붓으로 굵은 선을 그어놓은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수목한계선이다. 그 위로 보이는 산은 더 이상 식물의 생장을 허락지 않는 장소다. 돌산위로 내려앉은 하늘빛의 만년설이 보인다. 을씨년스럽기보다 함부로 발을 들여다 놓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인간과 신 사이를 경계해 놓은 듯한 묘한 기분까지 든다. 그 경계에 서서 문득 떠 오른 것은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이다.

 

어머님은 사흘째 꿈을 꾸고 계셨다.
“엄마, 같이 가자. 엄마, 나랑 같이 가.”
“엄마, 나는 무슨 옷을 입고 갈까?”
엄마와 나들이라도 가는 꿈을 꾸고 계신 것일까. 장날에 엄마가 사준 꽃무늬 옷을 찾고 있는 것일까.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소리 사이에 엄마를 부르는 단발머리 아이같은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큰어머님은 물을 데워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향나무의 짙은 향이 어머님이 누워계신 방까지 전해졌다. 저 물로 어머님의 육신을 깨끗하게 닦아 내겠지. 어머님 곁에 우두커니 앉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끔씩 어머님을 불러보는 것뿐이었다.
“토마토 밭에는 가 봤나.”
“비닐하우스에 나가봐야 할 텐데….”
꿈속에서도 밭일을 걱정하는 어머님의 손을 가만히 잡으면서 토마토도 잘 자라고 있고 밭에도 나가봤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다시 엄마를 부르다가 얼굴색이 부드러워졌다. 엄마와 손이라도 잡고 어디론가 가고 계신 것일까. 마음에 드는 고운 옷을 입은 것일까. 편안한 어머님모습에 나는 오히려 불안해졌다.
어머님이 눈을 떴다. 아, 저 순한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바느질솜씨가 없는 며느리의 이불홑청을 시쳐주다가, 단추를 달아주다가 ‘어머님’하고 부르면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이었다. 어머님은 나를 알아 보셨을까. 눈을 맞추고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이었다. 어머님이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건너가고 계셨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머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적요寂寥.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어머님을 차마 부르지 못했다. 나는 소리 내어 울 수 없었다. 어떻게 장례가 치러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나를 바라보던 눈빛과 한 줄기 눈물만 기억날 뿐.

 

곧 출발한다는 가이드의 말이 들린다. 일행들은 춥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에 오른다. 차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달린다. 침엽수들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수목한계선은 저만치로 밀려나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아야 한다. 곧 봄이 오면 돌산위에 푸르게 얼어있던 만년설이 녹아내려 신의 선물같이 대지를 적시겠지. 내 어머님의 눈물처럼. 그러면 싹이 돋고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열리고 온 우주는 바쁘게 순환하겠지.
옆자리에 앉은 남편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순한 눈으로 나를 보며 씩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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