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광주학생 운동에 참여, 선두에 서서 지휘하다 일경에 체포
(21)광주학생 운동에 참여, 선두에 서서 지휘하다 일경에 체포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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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강윤석, 제주청년동맹 화북지부 간부…혁명의 노래 전파·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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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온, 신명사숙 개설 ‘앞장’…강 이진, 두 차례 대정현감 부임
▲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모습. 광주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싸움으로 번졌고, 식민지 지배하에 억눌린 분노가 터지면서 항일운동으로 퍼졌다. <국가보훈처>

▲강윤석康潤錫:1911(일제강점기)~?, 제주 청년동맹 화북지부 활동, 광주 학생운동 당시 광주고보의 활동.


본관은 곡산, 강기업康基業의 아들, 그는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제주시 화북1동<벨도>에서 태어났다. 부친 강기업(1881~1946)은 광주에서 타계하니 고향으로 반장返葬되었다. 1946년 11월 30일 사망한 것으로 법적 신고를 하였다.

 

1994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앞서 강윤석, 부병훈, 임삼호, 김윤옥 등 4명은 기소되어 1931년 7월 31일 강윤석, 부병훈은 각기 징역 10월을 선고, 강윤석은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서중 전신) 4학년에 재학 중 1929년 11월 3일 동기생 김대원金大元(한림)과 함께 광주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 300여 명의 광주고보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대오를 지휘하며 투쟁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었다.


한편 제주청년동맹 화북지부의 간부로 있으면서 사립 화북교 6년생 신승근愼承根이 사망하자 동교 학생들이 교정에서 장지까지 장례 행렬을 진행시킬 때 청맹원靑盟員들이 학생들에게 적기가赤旗歌 등 혁명의 노래를 부르게 한 항일 활동이 일어났다.


그는 동지 부병훈夫秉勳·강윤석康潤錫과 함께 세 사람의 청맹원 주도하에 적기가를 고창하도록 하였다.

 

또 동년 3월 5일에 그는 강윤석과 함께 “화북학교에 숨어 있는 관광견官狂犬 강경진康京進·한상용韓祥庸·이창하李昌厦·고경수高京秀·강원형康源亨 등을 추방하고 교내에는 경찰권의 침입을 철저의 저지하라”는 내용의 삐라를 작성하여 마을 안 요소에 부착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청맹원 부병훈·강윤석·백우현·임삼호·양치업·김윤옥 등이 체포되었다.

 

임삼호, 김윤옥은 각기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언도가 끝나자 “우리들은 독립이 오는 날까지 싸우겠노라”고 연호하며 ‘공산당 만세’를 부르자 경비하던 일경은 즉시 퇴정시켰다.


동지 3명은 즉시 불복 항소하여 대구복심법원으로 넘겨졌으나 그는 항소하지 않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굽히지 않고 넓은 대륙 만주滿洲 벌판으로 건너가 무장 투쟁을 한다더니 끝내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의 매부 현정익玄廷翼:전 교장은 1993년에 행방불명을 확인.

 

▲강윤호康允豪:1934(일제강점기)~?, 변호사, 서울지법 판사, 본관 곡성, 남원읍 태흥리<펄-개>에서 태어나고, 제9회 사법司法고시에 합격, 춘천지법 판사, 서울지법 판사를 지내었다.


앞서 서귀농고를 거쳐 조선대학 법과를 졸업, 서울대 사법대학원을 수료했다.


제주지방변호사회 회장, 이어 제주도심청소청심사워원장, 제주도개발특별법개정 추진협의회 위원장, 공증인가 제주합동 법률사무소 변호사, 국보급國寶級 문화재를 소유했다.


그가 소유하고 있다는 국보급 문화재 안중근 유묵遺墨이 ‘國家安危 勞心焦思 庚戌於旅順獄中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수결, 天與不受反受其殃耳 庚戌二月 이하 생략, 이상 두 작품 가운데 어느 하나이다.


60대에 종명하기 전에 어느 작품을 어떻게 조치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강의석:생몰년 미상. 제16대 제주지방검찰청 지검장(1964.3~1965.9). 보성전문학교 졸업.


대전지검 검사(1948). 대검찰청 송무부장(1975).


▲강의온姜宜溫:1867(고종4)~1946, 향교 도훈장, 호는 백호栢圃, 본관 진주, 은열殷烈공파 염통공念通岳계 ‘어강於姜’ 입도 16세손, 초명 강병식姜炳植, 자는 기지器之, 애월읍 어도리<도노미> ‘열리왓-동네’에서 태어났다.


한림면 금악리<거믄-오름>에서 오래 서당 훈장을 하고 제주향교 도훈장都訓長이 되었다.


‘자리왓-동네’에 신명사숙新明私淑을 개설할 때 앞장섰다.


동 사숙의 사장師丈으로 활동, 문집으로 <백포집栢圃集>이 전한다.

 

이 책은 금악리에서 훈학을 할 때 쓴 시문집이었다.


외아들 강몽규姜夢奎(1912~1948)는 제주4·3사건 당시 의문사疑問死, 그 해 유복자로 태어난 손자 강승찬姜承燦이 한림읍 수원<조물-캐>에서 활동 중이다.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비의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강이진康履鎭:1798(정조22)~1865(고종2), 무신. 명월진 만호, 대정현감. 초명 응진應鎭, 본관은 신천, 조천면 신촌리<숙군> 강서반康瑞攀의 아들이다.


아들 재오在五와 손자 인호仁鎬도 무과 급제, 그는 1844년(헌종10)에 무과 급제, 1857년(철종8) 2월 신상흠愼尙欽의 후임으로 대정현에 도임하고 1858년 3월 좌천되었다.


또 1862년(철종13) 8월 신성흠愼性欽의 후임으로 재차 대정현에 도임하고 1865년(고종2) 3월 떠났다.


앞서 1864년(고종1) 8월에 정의현과 대정현을 군郡으로 승격하여 군수를 두고 제주목의 관할에서 떠나 직접 전라도관찰사의 관할 하에 두었다.


군기를 크게 보수할 때에 전 명월만호 김기행金沂行과 현 명월만호 강이진康履鎭은 그 책임을 맡아 1846년(헌종12) 7월부터 1847년 10월까지에 걸쳐 이를 완수하였다.


즉 교자궁 526장과 기타 무기 101종을 새로 갖추고, 또 군기 조총 854자루, 아병 조총 408자루, 각진 조총 73자루, 장전長箭 220개, 편전, 육량전, 화약, 철두구鐵頭具, 장창, 환도, 언월도偃月刀, 장검, 철학자鐵學刺, 천자장군전將軍箭, 지자·현자장군전, 부월, 화약궤櫃, 폐문고閉門鼓 등을 수선하였다.


당시의 지방 수령으로서 제주목사는 채동건蔡東健, 임백능任百能 등이며 제주판관은 홍경섭洪敬燮, 구재린具載麟 등이고 또 정의현감은 강만식康萬埴이 재임하였다.


본시 목사가 있어 전도 삼읍을 통할하던 특수 지역인데 변지에 군수를 둔 이후에는 제주목과 양군 사이의 마찰을 노출하여 행정이 문란해져서 1880년(고종17) 2월 양군을 다시 현縣으로 환원하여 현감을 두었다.


이 무렵 일어난 강제검姜悌儉난은 1862년(철종13) 10월에 일어났다.


민란의 원인은 부역과 징세의 불공평, 장세場稅, 화전세의 과징, 환곡還穀의 작폐, 전죽箭竹 공출에 대한 불평, 감색監色의 부정 등이었다.


대정현 광청리의 강제검은 제주목의 김흥채金興采와 더불어 민란을 계획, 동조자 김석구·장환·김석란·김연홍·박흥렬, 현재득 등을 중심으로 농민을 동원, 제주성문을 부수고 관영을 점거하였다.


옥문을 열어 죄인을 놓아주고 인부印符와 장부를 불태웠다.


민원의 대상인 관리 김종주金鍾周·김성수金性洙·김석한金錫翰 등 3명을 돌팔매로 죽이고 김석룡金錫龍은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이건필李建弼을 찰리사로 보내어 사태를 수습하게 했다.


목사 임헌대任憲大는 파면시켜 평안도 초산楚山으로 유배되고 제주판관 구원조具源祚도 파면되었다.


이듬해 2월, 강제검 김흥채는 효수되고, 장환은 참수형을 집행 당하였으며 나머지 주모자들은 유배되었다.


이 난은 전국적으로 발생한 임술민란과 궤를 같이한다.


또 대정현 감산촌에는 1862년(철종13) 서재西齋의 5대손 제주목사 임헌대任憲大가 ‘서재임선생적려유허비西齋任先生謫廬遺墟碑’를 세웠다.


목사 재임중 임헌대는 1863년 10월 18일 임술민란壬戌民亂이 일어나자 악정의 표본으로 체포되어 1864년 4월, 평안도 초산으로 유배되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1860년(철종11) 2월 제주암행어사 심동신沈東臣을 불러 보았다.


강이진康履鎭을 포상하고 승서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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