낄끼빠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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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과속은 사람을 당혹케 하고 긴장시킨다. 심술궂게 몽니를 부리기도 한다. 속도가 급변하는 것들이 늘 그렇다.

말의 변화에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말이란 사람들이 엮여 사는 사회라는 거대한 관계망에서 소통하기 위한 약속이다.

한데 언중(言衆)에서 이뤄진 말이란 기호가 조석으로 바뀌니 문제다.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수정되며 바뀌는 게 아니라 삽시에 변해, 모르면 사람을 바보 멍청이로 만들어 놓는다. 더욱이 그런 말의 변화를 주도하는 계층이 일부 젊은이들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소통이 단절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다. 더욱이 젊은이들은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다. 그들과의 소통부재는 행·불행을 떠나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말의 변천은 그것이 전체적이든 부분이든 사회와 문화가 변하고 있는 그 흐름을 반영한다. 말에도 생명이 있어 신생, 성장, 사멸의 역사적 과정을 밟는다. 사람 사이에서 또한 시대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천한다. 사람의 사상 감정, 삶의 모습, 그 시대의 문화를 투영하는 거울 같은 것으로. 매우 민감하다.

이를테면 ‘낄끼빠빠’란 말을 몇 번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마치 글자가 살아서 키득키득 웃는 것 같다. 타인에 대해 비판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현대인의 마음이 담겨 있어 부정적인 경향을 띠고 있어 보이는데도 딱히 싫지는 않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게 어디 쉬운가. 이 말을 꺼내 놓고 한 여류작가는 딸과의 관계를 이렇게 쓰고 있었다.

‘이 말을 던진 딸은 지금 놀아도 노는 게 아닌 아픈 청춘이다. 뭔가 하고 싶어도 하고 싶은 걸 할 여유가 없는 갑갑함을 고작 핸드폰에 품고 있다. 지쳐 가는 딸의 마음에 힘이 될 고운 말 한마디는커녕 대답도 못해 준 게 미안하다.’

젊은이와 대화해 보면 우리말을 하면서도 뜻이 엇갈리곤 한다. ‘공구’를 나는 공구(工具)로, 젊은 친구는 ‘공동구매’로, 조문(弔問)인 ‘문상’이 젊은이에게는 ‘문화상품권’으로 둔갑하는 게 아닌가.

올 한 해 날개를 단 몇몇 신조어를 보면서 놀라는 게 창의적 기발함 혹은 격의 없는 당돌함이다. ‘댕댕이’는 ‘멍멍이로 비슷한 형태를 표현한 것이라 얼른 와 닿는데, ‘발컨’은 엉뚱해 보인다. ‘발로 컨트롤하다’란다. 게임을 잘 못하거나 컨트롤이 느린 사람을 낮춰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말과 영어의 합성이다. ‘문찐’에 이르러 정신을 못 차린다. ‘문화·문명 찐따’의 줄임말로 문화나 문명에 뒤처져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을 비하해 하는 말이라나.

젊은 층과 말하다 보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한국인 사이에 높은 언어의 벽을 쌓고 사는 판이다. ‘아재’ 되는 건 한순간이다. 인터넷에서도 뜻을 알 수 없는 낯선 말에 부닥친다. 그때마다 ‘내가 인제 여지없이 늙어 가는구나.’ 하는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고답이’(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한 사람)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다고 나이 들었으니 무조건 우대해 주길 바라는 ‘나일리지’(나이가 많은 것을 앞세워 어른 대접해 주길 바라는 사람· 나이와 마일리지의 합성)가 되기는 싫다. 시대의 낙오자란 생각에 갑자기 서글퍼지는 게 아닌가.

‘할빠 할마’(할아버지와 아빠, 할머니와 엄마의 합성,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면서 조부모가 육아를 맡는 ‘황혼 육아’ 현상을 반영한 것) 시절도 후딱 넘긴 지금이다. 소한거리로 인터넷에 들어가 신조어나 검색해 봐야겠다.

낄끼빠빠, ‘빠질 때 빠지더라도 낄 땐 끼어’야지. 시대의 신선한 공기로 폐부를 그득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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