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자장 고정팔高正八. 그가 새긴 비석 글씨와 함께한 모습.

▲ 비석(碑石)

비석은 비갓(官石, 加檐石), 비신(碑身), 받침돌(座臺, 龜趺)로 이루어진다.
과거에는 신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달랐다. 비석에는 앞면(碑陽)에 제목을 쓰고 뒷면(碑陰)에 이력을 쓴다.

 

이때 비의 내용을 글자로 새기게 되는데 이를 각자(刻字)라고 한다.
각자란 돌이나 나무에 글자를 조각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글자 새기는 것을 조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석이 만들어지기까지 꼭 협업에 의한 분업의 역할을 거쳐야 하나의 비석이 이루어진다.
이런 일의 조화를 세상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다.  

 

▲가족사의 아픔을 딛고
서귀포시 대정은 대정읍 인성리에 사는 아담한 키에 굳은 의지가 돋보이는 얼굴의 각자장 고정팔(高正八), 그는 1939년생으로 아버지는 한학에 능했던 고문수(高文秀)이고, 할아버지는 고기창(高基昌)이다.

고정팔은 부인 송정희(宋貞姬) 여사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고 있다.
장남 석빈(碩彬)은 워싱턴 대학을 다닌 인재다.

 

아버지 고문수는 지역에서 명망이 있어 뛰어난 사람들과 교유했고 대정 교육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저희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한학을 했습니다. 대정지역에 아버지가 가르친 문하생들이 여럿 있습니다. 아버지가 사회운동을 해서 나는 반세기 동안 힘들게 살았지만 지금은 명예 회복됐습니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고정팔은 잠시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쓴 시라고 하면서 시 한 편을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이재수에 관한 시였다. 아버지 문하생이었던 이두생이라는 분이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 시를 보니 고문수는 역사의식이 매우 뚜렷한 사람으로 이재수를 진정한 남자이며 영웅으로 우러르고 있었다. 

 

辛丑年前李在秀(신축년에 이재수가)/堂堂時期一男兒(당당한 시기에 한 사나이로서)/取義死生終結死(옳은 일로 일생을 마쳤으니)/千秋萬年大名事(천만년에 큰 이름 남기도다)


고정팔은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팔방으로 찾고 있다. 왜곡되고 누락된 아버지에 대한 사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다.

 

   
▲ 고정팔이 다루던 조각 도구.

▲마음으로 사연을 새기는 사람
고정팔은 29세부터 비석 새기는 일을 시작하여 64세까지 만 35년 동안 그 일을 했다.그 이전에는 농사를 지었는데 큰 딸을 보면서 이웃에 놀러 갔다가 비석 글 새기는 것을 보고 자신도 집에서 장난삼아 비석 새겨보았다.

 

버린 폐품돌을 주워 연습을 해 보니 재미있어서 시작하게 되었다.
원도 그려보고 人자, 大자도 써보니 생각대로 글자가 되니까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 주문받아서 시작했는데, 생각대로 글자가 잘 나왔다. 차차 글자를 깊이 파기 위해서 망치의 압력이 중요한 걸 알게 되었다.

 

나중에는 계속 주문이 들어와서 상품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갈수록 글자 모양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글자는 처음에는 본을 그대로 베껴서 새기다가 글자 모양을 좋게 하기 위해서 인쇄체 같은 것을 열심히 보면서 연구하다 보니 글자 평가도 가능했고 나중에는 그가 직접 써서 새기게 되었다.

 

비석 글씨는 “심각(深刻)과 모양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글이란 아름다운 글을 말한다. 글이 좋아야만 조각도 예쁘게 나온다.

 

고정팔이 한문을 처음 배운 것은 7살 때였는데 천자문을 4분의 3이나 노래처럼 외우면서 뜻까지 외웠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저를 불러서 밥상이 파손된 검은 쪽에다 손에 침 발라서 한문 쓰는 연습을 시켰습니다. 저는 물로 따라서 글을 썼습니다”

 

다시 한문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중학교 2학년부터 1주일에 2번 배웠다. 그때 북한에서 피난 온 교사가 한문을 가르쳤다.

 

그 교사는 학생들에게 처음 한 글자씩 가르쳐주고, 그다음에는 네 글자씩 가르쳐 주었다.
그 후 고정팔은 한문의 구조를 분해해서 외웠다고 한다.

그러면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다.

 

“인체에 관계된 것은 모두 月(고기육 변)이 들어갑니다. 腕, 脚, 肩.... 등, 또 土가 들어가면 흙에 관한 것이고 石이 들어가면 돌에 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한문을 공부했습니다.”

 

일을 위해 배운 한문 실력이 수준급을 넘었다.

 

처음 주문이 들어오니 기분이 좋았다.
주로 주위에서 주문이 오는데 나중에는 소문 듣고 멀리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조이전 형님과 함께 서로 도와가며 일을 했다.

 

대정골은 비석으로 소문이 나있으니까 주문이 양쪽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돌 마련은 조이전 형이, 글씨 새기는 것은 고정팔이 분업으로 서로 도울 수밖에 없었고 서로가 좋은 일이 되었다.

 

비석돌은 산방석(산방돌)이라고 하는데 1년 치 예상을 해서 미리 주문을 해서 구해 놓는다.
70년대 초에 산방돌을 채취 못하게 하는데도 그리 심하게 단속하지는 않았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강력하게 단속을 했다.

 

그래서 오석으로 비석을 만들었다. 오석은 편지로 육지에 주문을 했다.
오석은 훨씬 단단하지만 기계(에어 툴)로 가공을 하기 때문에 수공으로 하는 산방돌보다 가격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고 약간 비싸다.

 

가격이 산방돌이 7이면 오석은 10 정도이니 자연히 오석을 선호하게 된다.
고정팔이 만든 비석의 크기는 두 자(60㎝), 두 자 반(75㎝), 석 자(90㎝),  석자 3치(1m), 넉 자(1m20㎝, 1m50㎝, 2m10㎝) 등이다.

 

비석 크기가 커지면 폭과 두께도 비례로 커진다. 비석은 무덤용으로 70% 정도 만들지만 자연석도 많이 쓴다.
자연석 비석은 가운데에만 글씨를 쓰고 가장자리는 자연 그대로 남긴 비석을 말한다.


고정팔은 성수기 때 새긴 비석이 연 통계로 치면 350~360장 정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글자 가격은 소자(小字)가 10원이면 대자는 100원 정도로 10배 차이가 난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비석을 다 만들고 나면 주문한 사람이 직접 가져간다.

 

비석을 의뢰받을 때는 기관에서는 기관장이 오고, 문중에선 회장이나 장손(長孫), 혹은 종손(宗孫) 등이 오는데 글자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글자를 알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의뢰하러 와야 한다.


비석을 세울 때는 산담과의 조화를 고려해야 한다. 산담 밖에서 볼 때 20~30m 거리에서 봤을 때 비석이 20~30㎝ 정도 산담 위로 보이면 보기 좋다.


비석은 마을 큰 길가 ‘고정팔 비석 조각소’에 주로 보관했다.
그 장소가 작아 인도에도 보관했는데 군청에서 단속을 하기도 했다.
새기든 안 새기든 비석돌의 양은 그대로니까 비석 수가 많을 때는 집 마당에다 보관도 했다.


비석의 성수기는 신구간에서 청명까지로 12월에서 4월 중순까지이다.
비석을 만들면서도 15년 정도는 농사를 병행했다. 비석 새기는 것이 농사의 3배 정도의 수입이 되었다.


부인이 농사일을 도와주어서 비석 일을 할 수 있었다.
주문 물량이 많으면 글자 파는 사람을 고용한다. 비석을 조각하는데 글자를 쓰는 나와 글자를 파는 사람의 돈 나누는 비율은 7:3인데 6:4를 달라 하고 5:5를 달라고도 한다.


하지만 6:4가 되면 거의 이익이 없다.
6:4인 경우는 주문 들어온 것을 차마 거절 못할 때 일을 맞추려고 한 것뿐이다. 지금은 억만금을 주어도 비석일을 안 하겠다 했다.


돌가루가 날려서 마스크를 해도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다.


비석일을 하면서 그래도 보람을 느끼는 것은 남의 조상이지만 그들을 위해 내 솜씨를 보태어 곳곳에 내 작품이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식들을 교육시킨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