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갈림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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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익,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누구나 평온한 삶을 살고 싶지만, 사노라면 어려움도 잠시의 기쁨도 함께 한다. 내게도 2002년(51세), 2011년(61세) 두 차례에 죽음의 광풍이 불었다.

2002년 유난히 무덥던 여름, 우리 친목모임은 남원읍의 이승이오름 초입에서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여름나기를 했다. 적당히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소화도 시킬 겸 이승이오름으로 혼자 나섰다. 1년 남짓 오름 동호회 리더로 활동을 했기에 조금은 자신이 있었다. 표고 539m, 비고(산 자체 높이 114m), 울창한 숲 등 사전지식도 갖고 있었다.

친구들이 밑에서 기다릴 것이니 20분쯤 답사를 하고 내려올 생각이었다. 좀더 30분쯤을 오르니 정상이었다. 욕심은 대부분 사고를 부른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엔 웬일인지 두 갈래로 끈이 매어져 있었다. 50%의 확률을 믿고 한 줄을 택한 것이 저승길 일보직전까지 헤맬 줄이야. 무슨 목적의 순환도로인지 모르면서 겁 없이 원시림으로 들어섰다. 결과적으로 조난의 시작이었다. 날이 어두워가자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덮쳐왔다. 장갑조차 없으니 원시림을 헤치기도 참 힘들었다.

“아프리카에 혼자 던져져도 살아남을 사람이 오 집사”라고 했던 담임목사의 말을 떠올렸다.

집에 있었던 딸에게 아빠 산에서 잤다가 내일 아침에 간다고 마지막 전화를 했다. 풀 섶을 모아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가 곧 일어났다. 이왕 죽을 것이면 끝까지 걸어보자고. 신의 도움인가. 길을 찾았다. 주변지리에 익숙한 친구가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나무에 매어졌던 끈의 하나는 표고버섯 재배 장으로 왕래하는 것이었다. 이승이 오름에서 동쪽으로 10㎞이상 떨어진 지경에 가서 조난이 끝난 것이었다.

정말 저승 문전까지 오락가락 헤매다 보니 인간이 사는 가족이 있는 이승이 그토록 그리움에랴.

남들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사연을 말함이다.

2011년 12월, 61세의 그 날은 운이 좋았다. 서귀포문협에서 정기총회 겸 송년의 밤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행사에 늦지 않게 호출택시를 불렀다. 결과론적인 일이지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비슷한 원인을 찾아 합리화시킨다. 호출택시에서 평소와 달리 행선지를 물어오니 불쾌했다. 요청하는 장소로 차를 보내주면 그만 아닌가. 집에서 모임장소인 천지연의 그 갈비 집까지는 10분 거리다. 내릴 장소가 가까워지자 안전벨트를 풀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사고가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퍽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택시는 공중으로 튀었다가 멈췄다. 순간적으로 사고임을 직감했고, 살고 싶다는 의지가 용솟음쳤다. 충격으로 정신과 몸이 따로 놀았다. 택시의 좌석에서 눈앞에 떨어진 지갑을 주우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제주시의 응급의료센터인 한라병원으로 급히 후송됐다. MRI 검사를 받은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후 4박5일 동안 목 수술과 중환자실에서 헤맸던 것은 기억에 없다. MRI검사에서 중병의 시초가 발견됐다고 주치의가 말했다. 본래의 목뼈 외에 불필요한 뼈가 덧붙어 자라는 아주 희귀병이라고 했다. 기왕증으로 난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집도를 했던 주치의는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안됐지만, 중병을 조기에 발견한 것은 천만다행입니다.”라고 위로했다. 그 병을 모르고 방치했을 경우 60세에서 65세까지 발병하는 일이 많다고 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링거 주사 바늘을 뺀 다음은 보조기를 찬 채로 재활치료실에서 무슨 운동이라도 하고자 애썼다. 그 결과 완쾌된 퇴원은 아니지만 12주 진단에서 8주 퇴원으로 앞당겨졌다. 다른 환자들이 내가 열심히 하는 걸 보고 따라 하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였지만, 전화위복으로 새 생명을 얻었음을 상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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