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인(時念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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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윤/수필가

숲길 산책이 길어지자 초등학교 축구대표 선수인 장손이 채근한다.
‘할아버지, 오후에는 축구하기로 약속했어요.’

 

한글날을 맞아 3대가 한라생태숲길을 걷는다. 가을 기운이 스며드는 오솔길을 걸으며 손녀 손자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행복이 안개처럼 밀려든다. 할아버지는 화선지에 먹물이 베이듯 저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무슨 날이라 우리 집 대문 입구에 태극기가 펄럭이지, 한글이 없을 때는 어떤 글을 사용했을까….


한글 창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데, 지난여름 팔공산 동화사(신라 소지왕 15년)의 영산전 벽화가 선연하게 떠오른다. 석조 석가 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상이 좌우로 열좌 해 있는 불전. 그 외벽에 그려진 씨름도(1902년)이다. 삭발한 나한들이 샅바를 잡고 씨름을 한다. 안다리 걸기를 시도하자 상대방 몸을 끌어안으며 넘어지지 않으려 버틴다. 구경꾼, 훈수하는 사람, 대기선수들도 보이지 않고, 오른편 여백에 세로로 ‘時念人 시렴한다’와 ‘適口理’라는 글자만 보인다. 왜 이곳에 몸을 부딪치며 상대방을 눕히려는 나한들의 씨름도를 그렸을까. 그 옆에 쓰인 생경한 글자 의미까지 물음표가 되어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쉼터에 이르자 김밥을 나누며 ‘時念人’ 글자를 읽으면 상금을 준다고 하자 주의 깊게 살핀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초등 1년 둘째 손자가 ‘念’ 자를 제외한 ‘時人’ 두 자를 읽는다. 빙고 박수를 친 후 ‘때 時, 생각 念, 사람 人’ 석자를 훈장처럼 소리 내어 읽고 뜻을 풀이해 주었다. 우리글이 없던 시절, 씨름하는 사람을 ‘시념인’으로, 저고리를 ‘적구리’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표기한 이두문자라 알려주자 신기해한다.


‘時念人 시렴한다’, 이 글자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궁리를 했을까.
세종임금의 민초를 생각하는 어진 마음과, 훈민정음 창제 당시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 고등학교 때 암기했던 내용이 되살아나는지 아들 며느리가 암송을 한다.


‘時念人 시렴한다’, ‘適口理’는 무슨 뜻일까 하고 질문을 이어간다. 나도 벽화 앞에서 한참 후에야 ‘時念人’은 씨름하는 사람이며, ‘適口理’는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저고리를 나타낸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한들의 씨름은 수행을 위한 자신과의 씨름이 아닐까 싶다. 이기기 위해 번뇌와 망상의 적구리를 벗어 버리고 몰입해야 한다. 기술을 통달하는데 정진하고,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고행과 생사초달(生死超達)에 의미를 둔다. 동작에 몰입하여 무념무상의 의식 상태에 이르러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마침내 심원한 통찰을 얻는다면   무애해탈(無碍解脫)에 이르게 되는 것이리라.


인생은 한 판뿐인 씨름판. 공부, 직장, 결혼, 사업, 질병 등 숱한 적수와 끊임없이 샅바를 잡고 맞선다. 때론 이성과 본능, 선과 악, 넓은 자신과 좁은 자신이 부딪치며 씨름한다.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닐까. 인생의 천하장사는 나 자신과 싸워 이긴 자이리라.


씨름인(時念人)은 때를 생각한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한 찰나, 잠깐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승패가 갈린다. 모든 생명체는 씨름판의 선수처럼 무한시간 속에서 한 순간을 살다 가는 것이 아닌가. 주어진 생명의 길이는 찰나에 불과하다. 하여 120년을 살다 간 모세는 시간을 계산하며 살라 권한다. 내 인생에 살날이 얼마일까. 그리고 이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를 생각하라며.

 

세상 모든 것에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수확할 때가 있다. 파괴할 때가 있고 건설할 때가 있다.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벌일 때가 있고 화친을 할 때가 있다.(전도서 3장 1~8절)


 
하나님은 인간을 시간 안에 두셨다. 현재는 신이 현전 하는 카이로스이다. 지금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다시 불어오지 않듯이 현재보다 더 좋은 때는 없으리라. 내 안에 있는 신성(神性)을 얽어매는 저고리를 벗고, 때를 분별하며 오늘이 마지막인 듯 살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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