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오르고 내릴 때마다 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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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상현 기자
  • 승인 2017.1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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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공항 활주로에는 수백여 4·3희생자 유해가 가족의 품 잃고 누워있어
비행기 오르내릴 때마다 한스럽고 가슴 찢어져...
▲ 지난달 23일 양용해씨(88)가 제주국제공항 철조망 사이로 4·3 당시 아버지가 암매장 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북활주로 부근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편집자 주] 제주4·3사건의 진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은 희생터 152곳, 잃어버린 마을 108곳, 4·3성터 66곳, 경찰 주둔소 82곳, 무장대 은신처 35곳, 역사 현장 62곳 등 모두 597곳에 달한다. 하지만 4·3이 발생한지 70년이 흘렀지만, 등록 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은 한 곳도 없어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비극은 되풀이된다. 4·3의 기억은 현장에 있다. 현장의 흔적에 귀 기울이려고 한다. 본지는 4·3 70주년을 맞아 앞으로 30회에 걸쳐 4·3 유적지를 집중 보도한다.

 

 

“한 구도 안 나왔어.”

 

아흔을 바라보는 양용해씨(88)는 망연자실한 채 제주공항 철조망 사이로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23일 오후 4시 30분께 양씨와 제주시 용담레포츠공원 인근 공터를 찾았다. 그는 이곳이 지난 2008년 공황 활주로 인근에서 진행된 제2차 4·3 행방불명인 유해 발굴 장소가 잘 보이는 곳이라고 했다. “그때 아버지 유해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안 나오더라고. 아버지 일행분이라도 나왔으면 했는데 실망이 대단했지.”

 

양씨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6일 한낮에 갑작스럽게 제주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양씨의 가족은 제주시 애월면 장전리에 살았다. “아버지랑 밭일을 마치고, 집 마루에서 어머니와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신엄지서장이 오더니 아무런 얘기도 없이 아버지를 끌고 가는 거야. 아버지 몸을 노끈으로 꽉 묶어다 말에다가 매고는 그냥 막무가내로 데리고 갔어.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지.” 양씨는 가슴이 메어 한동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양씨는 그때 20살이었다.

 

 

▲손가락 총으로 끌려가

 

이승만 정부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일제의 악습이었다. 정부 지시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지서별로 즉각 요시찰인에 대한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6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제주 전역에서 공무원, 교사, 학생, 부녀자 등 820여명이 예비검속됐다. 이들은 제주읍·서귀포·모슬포 경찰서 등에 수감됐다.

 

예비검속된 사람들 중에는 좌익단체나 무장대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전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서귀포경찰서장이 제주도경찰국에 보낸 ‘예비검속자 석방 상신의 건’ 문서에 나온 검속 사유는 ‘인민군 제주 상륙 등 무근지설 유포’ ‘과거 범죄사실 전무하나 태도 애매’ 등의 이유였다. 또 마을 사람의 중상모략으로 부당 구속되는 사례도 빈발했다. 양씨의 아버지가 이 경우였다.

 

“아버지가 마을 유지들에게 밉보였었나 봐 속된 말로 ‘손가락 총’으로 끌려가신 거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빨갱이로 몰았으니깐.”

 

이렇게 무고하게 끌려간 사람들은 그해 7월 말부터 8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군 당국의 총살 집행이 이뤄졌다. 제주경찰서에 수감됐던 양씨의 아버지를 비롯한 500여 명의 사람들은 현재 제주공항 활주로인 정뜨르비행장에서 총살돼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어. 시신을 찾으려고 정뜨르비행장 인근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물어봐도 얘기해주나. 무서워서 말 안 해주지. 그 이후로는 제주공항이 들어서버리고. 지금껏 시신도 못 찾고 아버지가 끌려가신 7월 6일 전날인 5일에 장례를 치러. 엄청난 불효지.”

 

 

▲ 송승문씨(70)가 4·3자료로 가득한 자신의 침실에서 ‘4·3수형인 명부’를 보고 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서

 

4·3 당시 정뜨르비행장에는 예비검속 희생자만 있었던 게 아니다. 1949년 군법회의 사형수들도 총살돼 이곳에 비밀스럽게 묻혔다. 송승문씨(70)의 아버지도 이때 이곳에 암매장됐다. 송씨가 막 태어났을 무렵이다.

 

24일 찾은 제주시 연동에 있는 송씨의 집 침실 벽 한 면은 4·3 관련 자료들로 빼곡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도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아무도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을 안 해주시는 거야. (레드콤플렉스 때문에) 워낙 얘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나중에 정뜨르에서 돌아가셨다고만 알게 됐지. 적어도 하나뿐인 아들로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알고 싶어서 자료를 부지런히 모았어.”

 

송씨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마리를 얻게 된 것은 지난 1999년 9월 추미애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1949년 군법회의 대상자였던 ‘4·3수형인 명부’를 발견하면서다. 그 안에 ‘송태인(우)’이라는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직업, 나이, 본적지, 사형 언도일자 등이 나온 것이다. 이후 마련된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등을 토대로 송씨의 아버지는 1949년 군사재판을 받고 10월 2일 제주경찰서에 갇혀 있던 사람들과 함께 정뜨르비행장에서 처형된 것으로 확인됐다. 그 수만 249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군법회의는 하루에 수백 명씩 심리 없이 처리하는 등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 군법회의 대상자 대다수가 4·3 직후 한라산으로 피신했다가 1949년 3월 군 당국의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선무공작으로 내려온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다. 송씨의 부모님도 4·3 무렵 중산간 마을인 오라리에 살았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면 방침을 무시하고 15세 이상 청·장년층이면 예외 없이 ‘폭도’로 낙인찍어 불법 군사재판을 진행했다. 이 기간에만 사형, 징역형 등에 처한 사람만 총 1659명에 달한다.

 

“2008년 제주공항 활주로에서 유해 발굴이 진행될 때 1949년 군사재판 희생자 등 한 구덩이에서만 총 259의 유해가 발굴됐어. 별로 크지도 않은 구덩이였지. 발굴 과정을 지켜보는데 뼈들이 서로 엉켜있고 유해 위로 겹겹이 또 다른 유해들이 쌓여 있고. 그것만 봐도 알아. 어떻게 처리된 거겠어. 그냥 막 죽이고. 구덩이에 쓸어 담고. 또 죽이고 그 위에 쓸어 담고. 아버지가 그렇게 희생당했다고 생각하니깐 화가 치밀어 올라.” 송씨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을 더 잇지 못했다.

 

 

▲ 4·3 당시 제주공항 활주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암매장 됐다. 양용해씨(88)가 2008년 진행된 유해 발굴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비행기 볼 때마다 한스러워

 

4·3의 비극 이후 제주공항 활주로는 제주의 ‘얼굴’이 되어갔다. 많은 관광객이 제주를 찾으면서 제주의 관문으로서 화려하게 변했다. 1956년 제주공항 활주로 1차 공사부터 1981년까지 4차례에 걸쳐 활주로를 확장했다. 그 사이 양씨와 송씨의 아버지 유해를 비롯한 수백여구의 유해들은 두꺼운 콘크리트와 흙 속에 파묻히게 됐다. 그 위로 해마다 많은 수의 비행기가 쉼 없이 오르내린다.

 

양씨는 공터에서 벗어나면서 굉음을 울리며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제주시내 곳곳에서 비행기가 보이잖아. 비행기가 얼마나 무거워. 그 육중한 비행기들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아버지 유해를 짓누를 거 아니야. 자식 된 입장에서 마음이 어떻겠어? 비행기 볼 때마다 한스럽고 가슴이 찢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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