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만에 보상법 제출..."4.3해결 이제 시작이다"
70년 만에 보상법 제출..."4.3해결 이제 시작이다"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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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맞아 특별법 개정안 통과 주목
▲ 지난해 12월 19일 국회 정론관에서 4·3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올해는 4·3 70주년을 맞이한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현대사의 비극 4·3은 화해와 상생, 평화로 나아가는 모범 선례가 돼야 한다.

본지는 4·3 70돌을 맞이해 과제와 전망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보상문제 물꼬를 틔우다

미완의 과제였던 보상에 대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지난해 12월 19일 여·야 국회의원 60명의 서명을 받아 오영훈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제주시 을)의 대표 발의로 4·3특별법 전부개정 법률안이 제출됐다. 법률안의 제명과 핵심은 ‘4·3사건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다.

배상은 국가 공권력의 위법한 행위로 발생한 피해를 보전해 주는 것인 반면, 보상은 국가가 적법한 공권력에 의해 벌어진 손실에 대해 지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국가 권력 스스로가 대량 학살과 폭행, 불법 구금을 자행했다고 인정한 사례는 없었다.

4·3은 당연히 배상으로 가야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운동 보상법은 부칙으로 ‘배상에 준하는 보상’으로 법이 제정됐다.

이를 볼 때 4·3특별법 개정안 역시 배상과 같은 보상법으로 제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서명을 한 의원 중 여당은 더불어민주당, 야당은 국민의당·정의당만 참여했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과 제3야당인 바른정당 의원들은 참여하지 않아 국회 통과에 가시밭길이 예고되고 있다.

현재까지 심사로 결정된 보상 대상자는 희생자 1만4232명, 유족 5만9426명 등 모두 7만3658명이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양윤경)는 70년 세월이 흐르면서 증거자료와 증언 확보에 대한 재입증이 어렵고, 대다수 유족이 고령인 만큼 전 희생자와 유족을 포괄적으로 집단 보상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4·19 및 5·18은 사망·상이·수형·연행·구금 등 피해 정도에 따라 개별심사로 개인마다 차등 지급하는 등 집단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개별심사로 갈 경우 각 개인 및 가족관계에 대한 재조사와 심사, 결정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면서 고령 유족을 감안하면 집단 보상과 개별 보상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됐다.

 

▲ 오영훈 국회의원이 4·3특별법 전부개정 법률안을 국회 의사과에 제출하는 모습.

▲4·3 이름 찾기
4·3특별법 개정안에 앞서 4·3에 대한 정명(正名)은 짚고 넘어갈 과제로 꼽힌다. 4·3은 아직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면서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4·3사건’이라 불리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4·19혁명, 5·16쿠데타와 같은 사건은 열흘 안팎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벌어졌기 사건을 정의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4·3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8년간 전개되면서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게 됐다.

대다수의 희생자가 무고한 양민인 점을 고려하면 ‘학살’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피해자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무장대 입장에선 ‘무장항쟁’, 군·경 토벌대 입장에선 ‘폭동’으로 바라보면서 여전히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비록 군·경에 의한 희생보다 그 비율은 훨씬 작지만,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도 엄연히 존재해 이념과 대결을 떠나 정명을 붙이기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4·3의 성격을 규정하는 정명에 따라 대립과 공격, 상호 비난이 재현될 우려기 제기돼 후세 사가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군사재판 무효
4·3 당시 군사재판은 두 차례 열렸다. 1948년 12월 제주도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는 내란죄로, 1949년 7월 육군 고등군법회의는 국방경비법 위반(이적죄) 혐의로 양형을 내렸다.

이들은 영장 없이 임의로 체포됐고, 군·경의 취조를 받은 후 재판절차 없이 형무소로 이송된 뒤 죄명과 형량을 통보받았다.

또 재판정에 집단 출석, 호명을 당한 후 일률적으로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수형인은 모두 2530명으로 이 중 531명(21%)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수형인들은 경찰서 등에 잡혀가 취조를 받았음에도 이들에 대한 조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여기에 기소장과 공판조서, 판결문 등 재판기록도 없다.

수형인들의 유일한 기록은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견된 4·3수형인 명부로 2530명의 이름과 주소, 죄목과 언도 일자가 전부다.

이에 특별법 개정안은 군사재판이 무효임을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