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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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소한 추위다. 문득 1637년 1월, 병자호란의 섬뜩한 장면이 떠오른다.

청군이 한양 인근까지 쳐들어왔다. 인조는 왕세자와 왕실 가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후에 강화로 가려 했지만 청군에 길이 막혀 버렸다. 결국 요새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45일간 항쟁한다. 50일치 식량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강화가 함락되고 왕실 가족이 볼모가 되자 하릴없이 산성을 나와 청에 항복하기로 결심한다. 말이 미끄러워 걷지 못하는 먼 눈길을 걸어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있던 청 태종에게 가, 항복의 표시로 3배 9고두를 했다.

대설, 살 에는 추위 속이었다. 상복을 입어 세 번 큰절하고 아홉 번을 맨 땅바닥에 머리를 쾅쾅 박아, 절하는 소리가 단 위에 앉아 있는 청 태종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그들의 인사 방식을 따른 것. 임금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조선이 청의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는 약속(군신지맹)을 행동으로 보였다. 역사에서 가장 굴욕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실록은 그날 눈이 크게 왔다 했고, 임금이 전날 밤늦게 남한산성에 돌아왔다고 썼다. 강화도로 옮기려 은밀하게 산성을 빠져 나서는데, 설풍(雪風)이 휘날리고 날씨가 찼다 한다. 발로 걷던 임금은 끝내 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심경이 어떠했을까.

최명길이 무조건 항복밖에 길이 없다 말했다. 저들끼리 항복 운운한 것은 사책(史冊)에 쓰면 곤란하다고 이판이 아뢰자, 임금은 사관에게 쓰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하지만 사관은 따르지 않았다. 쓰지 말라 한 임금의 말까지 명토 박았던 것.

항복문서가 작성됐다 수정했지만 김상헌이 찢고서 소리 놓아 울었다. 쏟아지는 눈 속에,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항복문서가 찢긴 날, 청군은 성 안에 대포질을 해댔다. 홍이포였다. 포에 맞아 사람이 여럿 죽었다. 대포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실록이 전하기로, 포탄이 거위알 크기라거나 다른 기록에 수박만하다 혹은 모과 정도였다고도 한다. 행궁 천장을 뚫은 포탄이 바다에 깊이 처박혔다고도 적혔다.

판이 벌어졌다. 누란지세의 형국으로 국운이 위태로웠음에도 산성의 신하들, 진영을 짜 무모하게 입을 놀려댔다. 척화파와 주화파 간의 팽팽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저 자들의 목을 베소서. 그리고 우리들의 목을 치소서” 항복한 임금이 겨우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어렵게 빈 배 두 척에 올라 강을 건널 때도 그랬다. 임금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먼저 배에 오르겠다는 신하가 여럿이었다지 않은가. 신하들이 ‘목을 치소서’라 한 것이 속마음이 아니었음을 어찌 인조 임금이 몰랐을꼬.

청과의 화친을 끝까지 반대하다 인질이 돼 끌려가며 김상헌이 읊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 동 말 동 하여라’ 시조에 담긴 화자의 비장한 심경이 오늘에 새롭다.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 고국을 떠나 낯선 심양 땅으로 끌려가며 가슴을 쳤을 테다. 항복을 반대하며 끝까지 결연했거늘, 국경 어느 지점에서 시를 읊으며 통한의 눈물을 뿌렸으리.

문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에 뒷말이 있었다. 사드보복 철회를 공식화한 성과에도 기자 폭행 등 홀대론도 만만찮았다.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설령 비난이라 해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로되, 한편 신중치 못한 뒤꼍 얘기는 지양해야 할 일이다. 적어도 외교에 관한 한 나라의 뜻이 하나에 모아져야 하리라. 상대가 중국 아닌가.

380년 전 병자호란 때, 그 ‘1월의 굴욕’을 잊지 못한다. 여하튼 중국에 끌려가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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