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평화기념관 다랑쉬굴 특별관은 1948년 12월 양민 11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진 지 44년 만인 1992년 발굴된 당시를 재현해 놓았다.

1948년 11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에 이어 중산간마을 주민은 통행을 금지하는 포고문이 내려졌다.

진압군(토벌대)은 해안에서 5㎞ 떨어진 중산간마을을 게릴라(무장대)에 협조하는 적성지역으로 간주,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내려오도록 소개령을 내렸다.

일부 마을은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전달되기도 전에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방화와 함께 총격을 가해 남녀노소 구별 없이 집단 희생됐다. 겨우 목숨을 건진 주민들은 두려움에 동굴과 야산에 은신했지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2월까지 4개월간 4·3사건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많은 도민이 학살됐다.

참혹한 상황은 1948년 12월 18일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오름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벌어졌다.

앞서 무장대는 세화리를 습격했다. 대대적인 수색에 나선 토벌대는 천연동굴을 발견했다. 이곳에는 종달·하도리 주민들이 피난생활을 했다.

 

   
▲ 다랑쉬굴 내부에 있는 유물은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다.

토벌대는 수류탄을 굴속에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다. 나가도 죽을 것이라 여긴 양민들은 응하지 않았다. 메밀짚과 잡풀로 불을 피워 동굴에 집어넣자 매캐한 연기가 번졌다.

모두 11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아홉 살 난 어린이 1명과 여자 3명이 포함돼 충격을 주었다.

학살 다음날 종달리 주민 채정옥씨(당시 22세)가 굴 안에 들어가 흩어진 시신을 나란히 눕혔다. 채씨는 희생자들과 이틀 전까지 굴속에서 생활하다 다른 굴에 있었기에 목숨을 건졌다.

채씨의 증언은 참혹했다. 연기에 질식한 이들은 돌 틈과 땅 속에 머리를 파묻고 고통스럽게 죽었다. 코와 귀로는 피가 흘러 내렸고, 한 명은 손톱이 없어질 정도로 땅을 팠다.

44년이 흐른 1992년 4월 2일. 제주4·3연구소에 의해 비극의 현장이 드러났다.

수직형 굴의 입구는 60㎝로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33㎡(10평) 남짓한 동굴 바닥에는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어떤 시신은 허리띠만 남아 있는 백골 상태로 변했다. 여자의 시신에는 비녀가 꽂혀 있었다.

주변에는 안경과 단추, 버클, 썩다 남은 옷가지, 가마솥, 숟가락, 곡괭이 등 102점이 유물이 발견됐다.

 

   
▲ 다랑쉬굴 입구는 안내문만 설치됐고, 입구를 바위로 막아 지금도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공안당국과 행정기관이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유족들과 협의를 거치지 않고 시신을 산천단 화장터에서 불살라버렸다.

발견된 지 한 달 보름만인 5월 15일 한 줌의 재가 된 시신은 김녕리 앞 바다에 뿌려졌다.

아홉 살 아이와 여성이 포함된 시신이 44년에 발견되면서 전 국민으로부터 공분을 샀다.

더 나아가 합장묘를 만들지 않고 이념과 사상의 굴레에 씌워 시신을 화장해 바다에 수장하면서 4·3진상규명 운동을 전국에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종교계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다랑쉬굴 4·3희생자 대책위원회’가 발족돼 범도민적인 장례절차를 촉구했다.

그러나 영혼들을 안장시킬 수 있는 진혼의 절차를 마련하지 않고 바다에 뿌려 흔적을 없애면서 지금도 희생들의 넋은 구천을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