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다랑쉬굴 학살 '4.3의 총체적 모순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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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 학살에 이어 공안당국의 흔적 없애기 전국을 뒤흔들어
▲ 1992년 희생자들의 유해가 바다에 뿌려지기 전 산천단 화장터에 안치된 모습. <김기삼 사진작가 제공>

다랑쉬굴 사건은 양민들의 참혹한 죽음에 이어 시신을 은폐하려고 수장을 시켰다.

당시 굴 입구를 커다란 바위로 막고 시멘트로 덮어 봉쇄해 버렸다. 지금도 굴은 바위로 굳게 닫혀있는 상태다.

희생자의 무덤을 만들지 않고 흔적을 지우면서 거꾸로 이 사건은 확대돼 전국을 뒤흔들었다.

전국에서 4·3 진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이해할 수 없는 장례절차라며 대서특필했다.

증언을 통해 희생자들의 신원을 밝혀준 채정옥씨(92·구좌읍 종달리)는 지금도 생존해있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4·3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26년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 미군정에서 첫 실시한 교원시험에 합격해 교편을 잡았다. 그런데 무장대에 의해 납치돼 산사람들과 생활하게 됐다.

입산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내와 큰아들을 비롯해 일가족 5명은 토벌대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밭으로 끌려간 그의 고모는 이마를 관통하는 총살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8년 토벌대가 다랑쉬굴에서 양민을 학살할 당시 그는 숨어서 이를 지켜봤고, 다음 날 시신을 가지런히 수습했다.

교사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대 우도국민학교에 재직 시절, 경찰관들이 우도까지 찾아와 교사직을 그만 둘 것을 종용했다. 사직을 하면 감시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는 교직을 떠났다.

이후 4·3단체에서 여러 차례 그를 초청, 공개석상에서 증언풀이를 하려고 했으나 트마우마로 인해 단 한 번도 공개석상엔 나오질 못했다.

공안당국은 희생자들의 합장묘를 조성할 경우 4·3순례성지가 될까봐 서둘러 화장한 후 수장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한 유족은 뼛가루 일부라도 주면 매장하겠다고 했지만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유해의 화장 문제가 확장된 것은 1992년 5월 4일 구좌읍장실에서 열린 회의에서다.

회의록에선 유족 대표 2명만 참석했다. 범도민 장례를 추진하려던 것에서 모든 장례 절차는 공안당국의 개입으로 일개 구좌읍장의 책임 아래 진행됐다.

4·3평화기념관에 전시된 다랑쉬굴 특별관에는 44년 만에 햇빛을 본 시신들이 허무하게 화장된 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외면하려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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