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적산 제주주정공장 귀속 놓고 시끌…주식회사 체제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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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주정공장-강인호, 제주판관·정의군수…강인화, 해녀항일운동 배후로 지목
강재량, 초대 도의원·참의원·대한탁구협회장…5·16 후 정계 은퇴
▲ 대표적인 4·3 유적 중 한 곳인 주정공장의 옛 모습. 1934년 일제에 의해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주정공장은 해방 전후 주요 산업시설로 활용돼 오다 4·3이 한창이던 1949년 수용소로 활용된 곳이다.

 

▲강인호康仁鎬:1863(철종14)~1899(광무3), 무신. 고종 때 무과 급제, 제주판관 및 정의군수를 지냈다. 본관은 신천, 전 정의현감 강이진康履鎭의 손자, 제주판관 강재오康在五의 아들로 조천면 신촌<숙군>에서 태어났다.


1888년(고종25) 7월 김재봉金在鳳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도임하고, 1889년 4월에 떠났다.


1889년(고종26) 10월 서홍순徐弘淳의 후임으로 재차 제주판관에 도임하고 1890년 5월에 떠났다.

 

그의 이름을 새긴 마애명磨崖銘이 현재 방선문訪仙門에 남아 있고 1892년 선정비가 교래에 세워졌다. 1896년(건양1) 11월 23일 정의군수로 임명되어 성준호成俊鎬의 후임으로 정의군에 도임하고 1899년(광무3) 2월 7일 원에 의해 본직을 면하였다.


강인호가 재임 중에 1898년 정의군 정당인 일관헌日觀軒을 중수하고 또 북성 위에 있는 의두정依斗亭을 중수하였다. 판관 재임 중에 안효제安孝濟는 추자도에 유배되었다.


▲강인화姜寅華:1902(광무6)~?, 제주야체이카의 항일활동, 중문면 중문리<중-물>에서 태어나 이발업을 하고 있었다.


해녀항일운동의 배후로 보아 50여 명을 1932년 5월 14일 경비선으로 실어내어 목포형무소에 수감했다. 이들 중 40명을 비밀결사 혁우동맹革友同盟의 맹원으로 1933년 2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8월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변호사 이의형李義珩(제주)과 여타 2명의 변호사들이 열변을 토했으나 32명에게 최고 7년형으로부터 10월형까지 각각 언도가 내려졌다.

 

▲강재량康才良:1917(일제강점기)~1994, 정치가, 호는 성재省齋. 본관은 신천. 성산면 신풍리<웃-내끼> 강석조康錫祚의 아들이다.


1934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대구사범학교를 거쳐 나고야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52년 5월 무소속으로 초대 제주도의원에 당선, 4·19 혁명 얼마 후 1960년 7월 29일 실시한 초대 참의원參議院 의원 선거에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23,257표를 얻어 당선, 전국공업고등학교장협의회 회장 및 대한탁구협회 회장, 재경제주도민회장(제11, 12, 13, 16대) 등을 역임하였다.

 

5·16 정변 후 정치활동을 그만두고 서울 신진新進공고 교장으로 다년간 재임, 조부 강승률康承律은 천자문에 있는 ‘남효재량男效才良’에서 이름을 재량이라 짓고 손녀는 ‘여모정렬女慕貞烈’에서 글자를 따 강정렬로 이름을 지었다.


제주주정濟州酒精의 전무와 화물 수송업인 삼양三養기업을 운영하였다.


도의원 재임 당시인 1952년 7월 10일 제2회 5차 본회의에서 논란 끝에 제주도립의원의 책임적 운영에 관한 건을 발의하여 상정, 이 안은 본회의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장시간 논쟁 끝에 강재량 의원이 “직영하라고 건의해 준 도의회를 무시한 도道 관계자를 불러 사정을 들은 후에 적절한 방안을 세우자”고 수정 동의함으로써 일단 정회되었다.


제주의 주정공장은 적산으로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여 동 공장이 귀속재산으로 편입되자 당시 강경옥康慶玉 국회의원이 상공부의 양해를 얻어 도민 공유재산으로 불하받자고 제안하자 도민 대표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추진대표로 강경옥과 홍순재洪淳宰를 선출, 그러나 이 일이 지지부진하여 신한공사에 근무하던 이종렬李鍾烈과 강재량이 연고권을 주장, 불하수속을 받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시켰다.


1956년 8월에 자유당 소속으로 도의원에 재선되면서 도의회 의장이 되었다.


1957년 제주도체육회장, 제주도탁구협회 초대 회장으로 본도의 탁구 수준을 전국 규모로 향상시켰다.

 

1958년 5월 강재량은 제4대 민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도의원의 사표를 제출, 그러나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출마를 포기했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의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도 상실되었다.


4·19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본도에서는 민주당 신파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서 제주도 산업국장 김선옥金善玉을 제주도지사로 임명하였다.

 

민주당 신·구파가 분당이 확실하게 되자 신파는 홍문중洪文中, 김일용金日用, 김교연金敎淵, 조승옥趙升玉, 이홍림李洪琳, 김진근金晋根, 김한익金漢翊, 안흥찬安興燦, 김옥천金玉千 등 9인을, 구파는 고담룡高湛龍, 양남전梁南躔, 김욱金煜, 김훈金勳, 신현범申鉉範 등 6인을 수습위원으로 뽑아 선거에 대비하였다.


얼마 후 민주당이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분당됨에 따라 민주당 제주도당부는 신파만으로 연차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홍문중, 부위원장 최수진崔守眞, 김일용金日用, 안정립安正立을, 또 구파도 동년 12월 6일 신민당 제주도당부 창당대회를 열어 위원장에 강재량, 부위원장에 임병수任炳洙, 신현범申鉉範을 선출하여 불원 실시할 도지사 및 도의원 선거에 대비하려 했다.


※(필자의 변): 1987년 나는 한림공고 교장이었다. 전국공업고등학교장협의회장 강재량康才良으로부터 반드시 총회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이 회의 이사였던 나는 이미 참석할 예정이었다. 강재량은 신진공고新進工高 교장으로서 수차례 회장에 당선된 것이며 그의 탁월한 사회 솜씨는 정말 일품이어서 어떤 경우도 회원 모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순수 공고는 100교로서 참석한 교장도 매우 많았다. 그 분이 사회로 나서지 아니하면 엉망진창에 빠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회원도 있었다.

 

▲강재언姜在彦:제주시 삼양동 출신. 제주농업학교 졸업(연35회). 오사카상과대학 졸업. 문학박사. 화원花園대학 교수. 저서 다수. 나는 북제주문화원장 당시 교유하면서 일어번역을 한 바 있다.


▲강재오康在五:1839(헌종5)~1891(고종28), 무신. 명월진만호 및 대정현감.


자는 자경子景이고 본관은 신천, 조천면 신촌리<숙군> 태생, 무과에 급제, 전 정의현감 강이진康履鎭의 아들이다.


1880년(고종17) 9월, 강진원姜鎭元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82년 5월에 떠났다.


재임 중 구폐를 혁파하니 그에 대한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충청도 공주중군과 대구영장大邱營將 겸 토포사를 역임했다.


1882년 3월 18일 중국 화륜선火輪船이 화순포 근처에 표도하니 현감 강재오가 겸 중군으로 임명되자 군병을 출동시켜 이 배를 문정(사정을 알아봄)하였다.


이 배에는 청국 사람 24명과 러시아 사람 26명이 타서 중국 천진항天津港을 출항, 일본 나가사키<長崎> 지역으로 무역하러 항해 중 태풍을 만나 이곳에 표도된 것이다.


이 배가 동년 3월 20일 출발한 연후에 군병을 철수하고 경계를 해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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