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장인의 손길 거친 산방석…도 전역서 이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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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석·망주석 등 다양한 석물 취급…3자짜리 비석 제작에 4일 가량 소모
평균 노동 2배 고된 작업 탓 높은 임금…제자도 양성
1970년대 자연보호 명목 ‘채석 금지’…외부서 오석까지 들어와 비석업 관둬
▲ 조이전 석장(사진 오른쪽)과 고정팔 각자장이 협업해 만든 비석과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양한 석물 제작


동자석 만들 때 목이 부러지면 안 되니까 돌의 결을 잘 알아서 깎아야 한다. 동자석도 땅에 박힌 자연석(생돌)을 캐서 쓴다.


땅에 박힌 돌이 단단하기 때문에 강하다.


동자석은 75cm 정도 크기로 만든다. 땅에 그대로 세울 수 있도록 밑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우리 대(代)에서 나 이외에 동자석을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동자석을 만들 때 코는 대부분 크게 만들었다.


아이 못 낳는 사람이 동자석의 코를 떼어다 갈아서 먹는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만들었다.
조이전이 만드는 동자석 제작 순서는 ①돌 캐기 ②징(알귀)을 대고 적당한 크기로 자르기 ③하겐노로 다듬기 ④손 마께로 다듬기 ⑤징(끌)을 대고 깎아내기 ⑥머리, 배, 하반부 전체를 함께 깎기 순이다.


망주석은 높이가 있으니까 조립한다. 큰 돌의 생산이 어려워 머리 따로 몸체 따로 분리해서 끼운다.


귀부(龜趺)는 주문이 없었다. 귀부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돌을 말한다.


갓석은 옛날 기와집 모양인데 팔작지붕 모양이다. 본뜨는 것도 돌 위에 바로 그린다.


한경면 고산리 수월봉 밑에 조이전이 만든 갓석이 있는데 비석 만든 후에 주문자가 갓석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직접 돌을 실어가 현장에서 만들어 씌워 준 일도 있다.


그 갓석은 1971년 이후에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조이전은 가끔 작은 비석에 갓석을 붙여서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 많이 만들지는 않았다.


비석 몸체와 지붕이 하나로 붙어 있는 비석이 제주의 들녘에 간혹 보이는데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제주형 비석인 것이다.


먼 거리를 운반할 수 있게 작게 만든 것이다.


상석(床石)도 누구 상이라는 정도만 알게 되고 묘주가 주문한다.


비석 3자짜리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돌 캐기에서 완성까지 4일 정도 걸린다.


글 새기는 것은 별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비석은 뭐니 뭐니 해도 돌이 좋아야 한다.


산방석에도 박석(너무 단단한 돌)이 나오는 데 징이 안 들어가고 다듬기 나빠 비석에 쓰지 않는다.
그래서 돌을 찾는 데는 하루 종일 걸려도 허탕 치는 날이 있다.


또 돌을 찾기는 했는데 잘라보니까 나쁜 돌일 경우, 속에서 물결이 많이 생겨서 금이 간 것, 쓸모없는 것들이 더러 나온다.


돌을 캘 때 어려움이 있다면 높이 있는 돌과 박힌 돌을 캐는 일이다.


큰 돌인 경우 돌 위로 올라가서 징을 내리친다.


돌은 주문이 안 와도 항상 나중을 대비해서 미리 크기별로 비석을 만들어 놓았다.


작은 것은 1자(지금자로는 1자 7치)짜리인데 표석으로 쓴다.


표석은 주로 공동묘지에 세운다.높이 50cm 정도, 두께 10~13cm, 넓이는 20cm 정도.


표석은 대부분 묘주의 이름과 사망 연도 만 쓴다.


돌일을 하는 도구도 다양했다.


필요한 도구는 큰뫼, 하겐 노(족은 메) 알귀, 쇠야기(얇은 쇠를 끼어서 알귀 사이에 끼우는데 돌에 잘 물리기 위해서), 지렛대, 곰보망치 등이다.


징은 칼날 같은 것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용도에 쓰이도록 만들어 사용한다.


끌의 종류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코지끌은 밑으로 좇기 위한 것이고, 평끌은 넓게 다듬기 위한 것이고, 옆끌은 비석 모서리(모사리, 넓은 것)를 깎기 위한 징의 일종이다.

 

 

▲ 땅 속 빌레에서 보여주는 비석돌 징(알귀) 자국.

▲산방산 비석이 전도(全島)를 누비다


돌일은 오늘날도 일당이 센 편이다. 석공 기술자는 하루 일당이 25만원 선이다.


이것에 맞춰 보조자 일당이 달라진다. 그만큼 고된 것이 돌일이기 때문이다.   

 
조이전이 돌일 할 당시 비석 일을 일당으로 친다면 다른 노동에 비해 평균 노동의 2배 정도였다.


보통 일당이 10만원이면 20만원 정도였다.


당시 월급으로 치면 7급 공무원 봉급의 2배 정도가 된다고 했다.


당시는 돌도 많고 비석 수요가 있어서 대정지역에서 6명 정도가 비석 일을 했다.


조이전이 비석 일을 시작해서 10년 정도 된 후에, 동네에서 배우겠다는 하는 사람이 있어 일당도 주고 일을 가르쳐 주었다.


이후 안성리 동네에 3명 정도가 비석 만드는 일로 독립했다.


그 후 대정 동네 비석집이 나중에는 10집 정도로 늘어났다고 했다.


대정(안성)에서는 조이전이 비석돌을 공급해 주어 비석에 조각만 했고, 제주시나 한림에서 비석 조각하는 사람은 대정에서 비석을 사가지고 이문을 남겨서 팔았다.


다른 지역 비석집에서는 비석돌을 대정에서 한꺼번에 사가지고 가서, 제주도를 도는 동신 화물을 이용해서 날랐다.


조이전이 기억하는 당시 다른 지역 비석집은 제주시에 오상옥, 화북 쪽에 오태홍, 성산포에 정태립, 한림에 양만철, 협재리에 배두한 등이 있었는데 이제 거의 돌아갔다고 했다.


아버지 때도 비석 만드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정(안성)에 두 사람, 사계리에 한 사람 해서 세 명이 만들고 있었다. 


그 후 덕수에도 만드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중에 없어졌다. 주로 인성, 안성에서 만들었다고 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장인


조이전이 비석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은 1970년대 자연보호 때문에 돌을 캐지 못하게 하고, 외부에서 오석이 들어오면서부터 산방돌로 만든 비석 주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비석 일을 그만두었다.


조이전은 비석 일을 그만두고서 과수원을 했는데 대정지역에서 가장 먼저 귤 농사를 했다고 한다.


하나의 산업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적용받는다.


조선시대 내내 수 백 년 동안 산방산돌이 인기가 높았다.


그것은 그 시대가 안고 있는 사회적 최고 이념이 바로 효(孝)였기 때문이다.


이제 공공의 선을 위해 송덕비를 만들고, 혹은 가문의 영광과 추모를 기리기 위해 돌을 깎던 장인의 역사도 저물어 가고 있다.    


시대의 변화는 많은 것을 사라지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등장하게 한다.


인생에 대한 경외감(敬畏感)과 부모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앞으로의 시대는 또 우리 앞에 어떤 기념비를 내놓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과거를 새긴 비석이 있기에 내가 누구이며, 또 우리는  누구인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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