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민중 1만여 명 성안으로 몰려가 부패관리 처단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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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임술민란(강제검난)-강재흠, 한의사로 대성·애월교 총동창회장 추대
강제검, 지배층 수탈에 ‘민중 봉기’ 주도…농민들 평등사상 일깨워
▲ 1862년 9월 12일 대정현 화전민이 과다한 화전세 시정을 요구하며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시작됐다. 강제검, 현재득 등의 주동으로 10월 6일부터 며칠간 제주 삼읍의 민중 1만여 명은 패랭이를 쓰고 성안으로 몰려들어가 평소에 증오의 대상이던 ‘부패관리 5인’의 처단을 주장했다. <사진=영화 ‘군도’의 한 장면>

▲강재의姜在毅:생몰년 미상, 제주판관.


1848년(헌종14) 8월, 탁종술卓宗述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51년(철종2) 2월에 떠나자 공적비를 세웠다.


1850년 4월 제주삼읍의 호수는 11,024호이며 인구는 남자 37,771명, 여자는 42,139명이다.


▲강재흠姜才欽:1922(일제강점기) 몰, 개업 한의사韓醫師, 일명 강대교姜大校, 본관 진주. 박사공파 정랑공正郞公계 ‘수강’ 입도 15세손, 국회의원國會議員 강창용姜昌瑢의 근친, 강창호姜昌豪의 큰 아들로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나 종형 강재두姜才斗 ‘재일본 한의사’의 영향을 크게 받아 한의사의 꿈을 실현했다.


앞서 경희慶熙대학 한의과 졸. 처음부터 인천仁川에서 의원을 개업하였다.


대성한 의사로서 인천시내에서 사회사업과 문화활동에 크게 기여한 바 있었다.


경희대 동문회 부회장, 원광대圓光大 한의과 강사講師, 재인천在仁川 제주도민회 회장, 1994년에 애월교 총동창회가 재창립再創立되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자 모교에 기여하고 회원의 친목과 발전을 위해 거금을 희사할 뜻을 표명했었다.

 

그만 급질急疾로 병몰, 큰 아들 강병주姜炳柱 ‘1947-현’ 박사는 의대를 나와 부업父業을 이어 인천에서 개업의로 활동 중이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총동창회의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2007년 애월교 동창회의 재기를 위해 총회를 소집하여 김종호金宗昊를 제2대 회장으로 선출, 새로운 중흥을 이룩하였다.


※(필자의 변): 새로운 회장이 찾아와 동창회 고문을 수락해 달라고 해서 응락했더니 장시영張時英(애월), 장정언張正彦(곽지), 김관진金官振(애월), 장주열張周烈(하가) 등이 수락한 상태였다. 이들은 ‘총동창회명부’를 발간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는 이를 하겠다고 하면서 일신학교, 구엄교와 하귀교까지를 포함하는 ‘제주애월읍명감’(총536쪽)을 만들어 2011년에 환영리歡迎裏에 발간했다.

 

▲강정은康禎殷:1932~2016, 서귀포시 보목동 출신. 제7·8대 제주도교육감.


서경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행정 석사과정, 미국 로스앤젤레스시립대학교 교육학 명예박사학위 취득.

 

1988년 2월부터 1992년 2월까지 제7대 제주도교육감을 지낸데 이어, 1992년 2월부터 1996년 2월까지 민선 초대 교육감인 제8대 제주도교육감을 역임했다.


1951년 교육계에 입문해 40여 년을 제주 교육 발전에 힘썼으며 도덕성 교육 강화, 학생 위주 봉사행정, 존경받는 스승상 정립 등 업적을 남겼다.

 

전국 최초로 도내 초등학교 100% 급식을 실현해 본격적인 학교 급식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도덕성 높은 제주인 육성을 위한 교육 강화, 학생 위주의 봉사행정 구현, 존경받는 스승상의 정립, 미래를 개척하는 교육력의 배양 등을 목표로 도·농간 학력 격차를 줄이고 과학교육의 내실을 높이는 데 업적을 남겼다.


또 ‘사랑의 사도상’ 제도를 처음으로 만들어 운영했고, ‘제주 장애학생의 날’을 제정·선포해 특수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국민훈장 동백장과 모란장 등을 받았고, 2008년에는 인생수상과 교육 논단을 엮은 저서인 ‘나는 행복한 교육자,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이다’를 발간했다.


2016년 10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강제검姜悌儉:?~1863(철종14), 철종 때 제주 민란의 주모자. 안덕면 서광(옛 光淸) 사람.


1862년(철종13) 가을부터 세 차례에 걸쳐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안으로 섬 특유의 경제적 수탈과 밖으로 임술민란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사건이다.


강제검이 주도한 임술봉기壬戌蜂起는 진주 농민투쟁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이로써 농민들의 평등사상에 눈을 뜨게 하였다.


앞서 지배계층이 수탈에 저항하여 학정虐政에 반기反旗를 들었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이 의의가 크다.

 

같은 해 9월 12일 제1차 봉기는 대정현 화전민이 과다한 화전세를 시정하는 데 있었고 주동자는 대정현 자단自丹(현 德修)리의 조만송趙萬松이었다.

 

같은 날에 화전민이 감색監色의 처소로 몰려가 뇌물로 받아둔 재물과 화전세 납부 문서를 불태우고 색리를 구타하였다.


또 9월 13일에는 답험감관踏驗監官의 집을 때려 부수었다. 9월 15일 아침에 성문이 열리자 색리色吏(말단 향리)와 이방吏房의 집을 부수고 재물을 꺼내어 짓밟았다.


이때 1000여 명이나 되는 봉기 민중은 제주목사 임헌대任憲大가 모든 폐단을 제거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하였다.


제2차 봉기는 강제검姜悌儉, 현재득玄才得(서귀) 등의 주동으로 10월 6일부터 며칠간 계속됐다.


제주 삼읍의 민중 1만여 명은 패랭이를 쓰고 성안으로 몰려 들어가 부패관리의 죄를 들추어내는가 하면 평소에 증오의 대상이던 부호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우고, 혹은 그 재물을 빼앗기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하였다.


한편, 제주항과 서귀포에 정박 중이던 내륙 상인의 교역 선박을 습격하여 그 재물을 빼앗고 불태웠다.

 

그러나 도민을 괴롭혀 오던 대표급 부패관리 5인을 직접 타살하려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목사가 대신 그들을 법에 따라 처형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뒤 흩어져 돌아갔다.

 

제3차 봉기는 11월 15일부터 12월 9일까지 계속되었다. 강제검, 김흥채金興彩(봉개), 박흥열朴興悅(소길), 조만송 등을 주동자로 한 군중의 수는 제2차 봉기 때의 2배를 넘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 군중은 15, 16일 성 밖에서 부호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우면서, 목사의 회유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17일 오후에는 남쪽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아직까지 다섯 죄인(부패 관리 5인)을 처형하지 않았음을 성토하면서 관아를 점거하니, 목사는 겁에 질려 화북포로 피신하였다가 이 달 25일에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봉기군은 12월 9일까지 모든 행정을 마음대로 처결하였다.

 

이때 군중이 부패관리 5인을 처단했으며, 집을 부수거나 불태운 것이 141호, 재물의 손실이 수만 냥에 이르러 임술민란의 대표 급에 속하는 농민 운동이었다.


이 봉기는 안핵사 이건필李建弼에 의해 다음해 4월에 완전히 수습되었는데, 처리 상황은 관리측이 제주목사 임헌대의 함경도 귀양을 비롯한 17인이 벌을 받고, 민중측이 강제검, 김흥채의 효수를 비롯한 22인이었다.


1863년(철종14) 2월 29일 제주방어사 정기원鄭岐源은 난민의 최고 주모자 강제검을 효수하여 이를 보고하였다. 또 조만송趙萬松(덕수)도 피살되었다. 이 사건을 제주의 임술민란 혹은 강제검난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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