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회의’-우울한 일본 사회의 현주소
‘일본회의’-우울한 일본 사회의 현주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국제관계학부 특임교수
최근 일본의 우경화를 상징하는 ‘일본회의(닛폰카이기)’를 ‘해외논단’의 주제로 잡아 시작하는 건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이며,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에 거주하면서 고향 제주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릴까 고민할 때 이 문제를 제쳐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여러 현안이 산적한 한일관계를 생각할 때 현재 일본 사회의 저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보수화나 우경화가 눈에 띄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 일본은 ‘단일민족’이라 이야기될 만큼 동질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 보다 다원적이고 열린사회로 바뀌는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 위안부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고노담화’(1993)나, 일본 수상으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천명한 ‘무라야마담화’(1995)가 실현됐고, 역사 인식이나 타자 인식 면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반성은 근대 국민 형성 과정에서 조성된 일본인의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위기감이나 반발이 글로벌화 과정에서 사람들이 직면하는 박탈감과도 결부되면서 일본 사회 저변에 감돌기 시작한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 주장하는 역사수정주의 대두 등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런 일본의 보수화나 우경화의 추진력이 되는 조직이 바로 ‘일본회의’인 것이다. ‘일본회의’는 1981년 우익 학자·문화인·경영자들에 의해 조직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1974년에 신종교·신도(神道) 계열 종교단체가 중심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함께 1997년 출범한 최대 우익 정치운동 단체이다. 그 기본방침은 전전(戰前) 천왕중심 국가 질서나 전통 문화의 재건이며, 이를 위해 국방력 강화, 헌법 개정, 그리고 애국 교육 추진을 내세운다. ‘일본회의’를 지원하는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에는 2016년 제3차 아베 내각의 각료 3분의 2, 국회의원 260명이 소속돼 있고, 정치권에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게다가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광역자치단체)에 본부, 241개 시구정촌(市區町村·기초자치단체)에 지부를 두고 일본인의 일상적 종교의식에 뿌리를 둔 활동을 펼치면서 시민사회에 깊이 침투하고 있다. 또한 ‘모두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민의 모임’ 등 다양한 ‘프론트 단체’를 조직해 우경화 세력을 끊임없이 넓히고 있다.

2016년부터 2017년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일본회의’의 실태를 밝히는 보도나 저작이 잇따라 간행됐다. 구미지역에서도 ‘초국가주의 단체’(프랑스 르몽드), ‘급진적인 내셔널리스트 단체’(미국 내셔널 리뷰) 등으로 보도됐다. 한국에서도 위험한 극우집단으로 경계 의식을 나타내는 보도가 잇따랐다. 이렇듯 ‘일본회의’에 대한 비난이 과열되자, 최근에는 ‘일본회의’라는 간판을 내걸어 두드러진 언행을 하는 건 삼가는 기미가 보인다. 하지만 ‘일본회의’는 여전히 일본의 정치권이나 경제계, 학계와 문화, 언론 등의 세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700만명이나 되는 시민이 거리에 나와 촛불을 손에 들고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촉구해 이를 실현했다.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한국을 지배하던 보수·우파 세력은 실추하고, 진보정권 하에서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민사회로의 전환이 모색되고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같은 가치관을 지향하면서도 오늘날 한일 양국 사회의 벡터는 정반대처럼 보인다. 이웃 나라로서 진실어린 동반자가 되기 위해선 아직 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 것 같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