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의 기쁨
나이듦의 기쁨
  • 제주신보
  • 승인 2018.01.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옥란

소담스런 눈꽃이 만발했다.

사통팔달 불어대는 바람조차 어젯밤부터 겹겹이 쌓여 만개한 눈 꽃 잎을 낙화시키지 못한다.

사나운 바람보단 따스한 해님이 나그네 옷을 벗겼듯 햇살이 퍼지면 순간에 사라 질 눈 꽃 잎이다.

우리도 찰나적 기쁨들을 지속적인 행복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저런 눈 꽃 같은 사랑을 피워 낼 수 있지 않을까?

오랜 인고의 시간으로 반 백을 맞은 오늘에서야 세월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보단 주는 것이 많았음도 알았다.

기약할 수없는 짧은 생애로 피어 난 눈꽃이 가슴 시릴 만큼 정겹고 아름다운 날 골목의 제일 연장자이신 노부부를 초대했다.

골목을 엇비슷하게 마주한 100m도 안 되는 거리지만 약속 깨지기에 충분한 적설량! 어림잡아 30㎝는 넘을 눈밭을 걸어오시는 우산 속 노부부가 한 폭의 그림 같다.

팔십대를 건너신 지 두 해가 지났건만 노부부란 표현이 송구스러울 만큼 강건하시다.

눈부신 의학 발전에도 팔십대 무릎과 고관절은 정교한 시술만으로 온전한 일상 복원은 기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모든 과정을 극복하시고 제주 중산간의 건강한 부부 일상을 되찾으셨으니 이런 기적이야말로 극대화된 나이 듦의 기쁨이지 싶다.

점심 메뉴는 매생이 굴 떡국에 밤콩을 듬뿍 넣은 밥이다. 매생이 국물에 흰 떡이 사철 푸른 붓 순 나무 초록 잎마다 피어 난 정교한 눈꽃과 닮은꼴이니 탁월한 메뉴 선택이었다.

아꼈던 참나무 화력이 현무암 난로 진가를 발휘하니 꼭꼭 닫았던 이중창 한 겹을 열 수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에 가득 찬 뒤란 눈 풍경이 한 폭의 동양화다.

“떡국만 한다더니 밥도 했어? 밥에 넣은 이 콩은 쥐 눈이 콩이야?” “아니요! 제주 토종 밤콩 이요!”

“그래? 정말 밤 맛이 나네! 이 콩 좀 줄 수 있어?” “뭐하시게요?”

“내가 이래 뵈도 콩 박사잖아? 심어 보려고”

제주 입성 팔 년차 토박이들과 소소한 일상을 나누지 못했어도 먹거리엔 관심이 많았다.

“제주도 우영엔 토종이 자란다.” 제목만으로도 관심 폭발이었고 여성 농민이 찾아낸 토종 씨앗 이야기가 부제인 책이니 밤콩과 선뜻 받았던 선물이었다.

전 지구적 유행으로 국적 불명의 건강식품이 넘쳐나는 작금 면면히 살아있는 토종 씨앗이 소중했다. 후원과 정당한 대가 지불선이 나의 한계치였다.

매해 콩, 옥수수, 푸성귀 농사를 하시면서 밤콩도 심으시겠다는 진취적 말씀에 찔끔한 까닭이다. 제주 입성 시기는 빨랐어도 연륜으론 결코 적지 않으셨는데 완전 농사꾼 면모시다.

노화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상적 변화를 조절하시는 결과물이 아닐는지.

단출한 은퇴 부부 일상에서 나이 듦의 기쁨을 나눌 수 있음은 농사 법칙에 순응하는 것뿐임을 깨닫게 하신다.

자식 농사에 전력투구했던 젊은 날의 추억, 불특정한 손주와의 만남, 요양원 부모님께 충분치 못한 효도, 유효일자 상관없는 지인들과의 인연 보듬기 등 열거하기 힘든 기쁨들이 농사 법칙에 근간을 두었음이다.

백세 시대를 외치는 즈음 부부 생활 마무리로 이혼, 졸혼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일탈의 범주에 속하는 경우가 많은 이혼, 졸혼보단 노후를 함께 하는 부부들이 대다수임은 확실해 보인다. 젊음과 늙음을 공유할 수 있는 부부의 삶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란 생각도 세월이 알려 주었다.

사흘 연이은 꿋꿋한 저 눈 꽃잎을 바라보며 노부부와 함께 나눈 소박한 밥상도 나이듦의 기쁨이었다. 아직 육십 대인 우리도 저런 팔십대를 맞을 수 있기를 설렘으로 기대한다.